란마루 - 가장 완벽한 아침 =================================================================================== 가장 완벽한 아침 01 올해는 게가 풍년이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오뎅 국물에 게가 세 마리 이상 들어가는 법은 없다. 모르겠다. 듣기에 거한 일식집에서는 오뎅보다 꽃게가 많이 들어가는 오뎅탕도 있다고 하더라만 개당 500원의 저렴한 서비스를 자랑하는 마차표 오뎅엔 꽃게 세마리를 하루동안 우리는 것만으로도 제법 투자를 한 것이다. 가끔 가다가 까먹고 이틀을 쓸 때도 있지만 그것은 절대로 고의가 아니니까 시비 걸지는 마라. 방배동엔 바가 많다. 그냥 클럽 바, 칵테일 바부터 '바 girl' 들이 다니는 룸, 그리고 호스트 바까지. 저 호화주택가의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바들에 종사하고 있는 애들은 물론 여길 오지 않는다. 눈 높은 사람들에게 팔려 가는 거라 이쁘기는 더럽게 이쁘더라, 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기는 하지만. 이쁜 것들은 이쁜 값을 하는지라 오뎅 같은 건 안 먹는 모양이다. 삐까 번쩍한 외제차를 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은 봐도 차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질 않으니 완전히 그림의 떡이 아닌가. 잠재고객이라고 하기에도 미안한 것이, 어쩌다 생각이 나서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고정 손님이 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래서 뜨내기를 제외한 내 단골 고객들은 그 밑의 시다들이다. 웨이터를 비롯해 웨이터 보조, 주방 시다, 대리 운전하는 놈들에서부터 가끔 가다 동네를 순찰 도시는 똘마니 깍두기들까지. 소주 한 잔에 꼼장어 앞에 놓고 울다 웃다가는 인생들은 그렇게 바닥 중에서도 바닥을 맴돌고 있는 가련한 놈들뿐이다. 술 먹다가 울고 가는 년 놈들도 예사고, 고작 김밥 한 줄 먹어놓고 긋고 가는 병신 같은 새끼도 있고. 그런 게 팔자다 싶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거지. 세상에 떵떵거리면서 더럽게 잘 산다는 놈들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그거야 사회 극소수고 세상의 다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비참하고 슬프고 사는 게 더럽다. 어렸을 때 나를 그렇게 괴롭히던 박탈감은, 다 자라 돌이켜보니 참 치기 어린 어리석음이었다. 가난은 부모의 죄가 아니었다. 없이 사는 것은 부모가 무능력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쉽게 말하는 놈들은 정작 제 손으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는 것들이다. 부모에게 기생하면서, 자신이 더 풍족하게 착취하지 못한다고 투정을 부리는 잡것들. 내가 그런 잡것이어봐서 아는데, 정신 차리고 나면 그거 기분이 꽤 더럽다. 부끄러운 기억은 세월이 지나고 나서도 문득 문득 기억나니까 - 특히나 빵이나 원 같은 데 들어가서 밤중에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더욱 그러하니까 - 웬만하면 부끄러울 짓은 하지 말라는 게 나의 충고다. 여기까지 들으면 알겠지만. 그렇다. 나는 자영업자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노점을 하는 자영업자다. 사람들은 내 가게를 포장마차라고 부른다. 가장 완벽한 아침 01 "우동 한 그릇." 보기와는 다르게 탁한 목소리가 새벽 공기를 울렸다. 각을 잡는 것도 아니고, 살살거리는 것도 아닌 그저 지친 듯 만한 목소리. 이 동네에서 새벽 네시까지 돌아다니는 남자들의 부류는 딱 세 종류다. 깍두기. 삐끼( 및 대리운전을 포함한 시다 일동). 그리고 호스트. 가장 피해야 할 존재가 바로 제일 앞의 부류이고, 가장 환영할만한 부류는 두 번째다. 깍두기가 포장마차에 들른다는 것은 자릿세를 걷기 위함일 뿐이지만, 삐끼들은 출출한 배를 채우려고 저렴한 포장마차를 자주 애용한다. 하루 하루가 근근한 노점의 주인에게 그 차이는 아주 크다. 하지만 이 손님. 아무리 봐도 첫 번째 부류는 아니고 두 번째는 더 아니다. 첫 번째라고 하기엔 각이 너무 부족하고, 두 번째로 하기엔 ....... 유흥업소 관계자들이 저 얼굴을 삐끼 정도로 써먹을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다. 내가 만원을 걸어도 좋다. "꼼장어와 소주 한 병 추가." 얼굴에 멍을 하나 달고 들어온 고운 손님은 주문을 계속했다. 얼굴은 괜찮은데 나이가 좀 들었다. 스물 아홉? 서른? -스물이 꽃띠라는 호스트가 서른이라면 이미 퇴기 취급이다. 그렇다면 새끼 마담? 상상이 뭉글 거리면서 부풀어오른다. 개인 생활도 없이 장사하면서 생긴 취미가 손님 정체 맞추기다. 솔직히 이 재미라도 없으면 십 년 동안 이 짓도 못해먹었다. 머릿속은 분주하게 돌아가지만 손놀림은 재빠르다. 공으로 노점 밥을 먹은 게 아니다. 순식간에 면을 말고 꼼장어를 불에 올려놓는다. 소주병도 건네줬다. 오프너를 마저 건네주려는데 손님은 라이터로 병을 땄다. 많이 해본 솜씨인 게 유흥업소 종사자가 아닌가 하는 내 의심을 굳게 만든다. 방배동 카페골목이다 보니 호스트들이 많이 지나다닌다. 차 타고 지나가는 거 구경은 많이 했지만 눈앞에 대놓고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런 놈들은 포장마차 같은 데 잘 안 온다. 가까이서 보니 과연 여리여리한 게 돈주고 봐도 아깝지 않게 생기긴 했다. 요즘 여자들은 키 큰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던데 신장도 훤칠한데다 얼굴상이 여자들이 좋아할 상이다. 잘생겼다고 하기엔 좀 그렇고, 눈꼬리며 입꼬리가 뭔가 근질근질하게 생겼다. 요염하다고 해야 할지 섹시하다고 해야 할지. 깔끔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색기가 흐른다. 그런 분위기가 그냥 좀 봐줄만 한 외모를 제법 봐줄 만하게 만드는 것 같다. 확실히 이런 분위기가 그쪽에서는 먹히는 모양이다. 진석이네 바에서 제일 잘 나가는 수진이만 해도 어디 예뻐서 인기가 있는 건가. 저렇게 생겨먹은 꼴이 남자들을 자극하는 거지. 하지만 인물 잘났다고 해서 인생이 잘 나가는 건 아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화류계에서 굴러먹는 몸이면 더 그렇다. 고등학교 때 얼굴 잘났다고 인근 여학교에서 스타 만들었던 진석이 놈도 새끼마담 꾀임에 빠져서 호빠에 들어갔다가 삼개월 만에 인간 불신이 되어서 뛰쳐 나왔댔다. 마이깡(빚)으로 천만원 만들고 나왔다 길래 미친놈이라고 그랬는데, 그나마도 적게 만든 거라고 하니 말 다했다. 마음속으로 상대의 정체를 완전히 호스트라고 규정을 짓고 보니, 얼굴에 든 멍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멍도 멍이지만 무언가에 긁힌 것 같은 자국이 영 꺼림직하다. 진상 손님이라도 만나 얼굴을 긁힌 것인지. 말이 손님이지 사실은 호스테스들이 꼬장 부리러 오는 게 대부분이라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귀에 딱지가 앉은 게, 진석이 놈은 아직도 술을 마시면 이를 박박 갈면서 그 이야기를 한다. 하긴 호스트 하는 놈이라면 포장마차 와서 밥 먹고 있는 것만 봐도 그 인생 얼마나 처량한지 알만하다. 내 가게를 이런 데라고 하긴 뭣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까지 했다. 이십대 후반에 호스트 바 나가는 신세가 어련할까 하는 생각이 연이어 들었다. "꼼장어 나왔습니다." 플라스틱 접시에 꼼장어 얹고 안된 마음에 오뎅 몇 개 담은 대접도 얹어줬다. 우동국물 반주로 소주 먹던 손님이 고개를 든다. "오뎅은 안 시켰는데." "서비스요." "왜?" "장사 접을 때가 됐는데 남았거든." 줘도 시비다. 말꼬리가 짧은 것이 불만스러운가. 인상이 굳었다. 하지만 내 말투는 나도 못 고치고 어머니도 못 고치는 병이다. 놀던 가락이 있어서인지 나보다 어려 보이는 상대에게는 존대가 쉽게 안 나간다. 이 말투에 시비가 붙기도 많이 붙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상대가 보거나 말거나. 나는 냄비 뚜껑을 열고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을 펐다. 이건 내 밥이다. 장사 끝날 때쯤 해먹고 자야지 장사도 걷고 집에 가서 또 해먹으려고 하면 귀찮아서 아침 못 챙겨 먹는다. 점심은 자느라고 못 먹으니, 아침을 못 먹으면 하루에 저녁 한끼로 살아야 하는 판국이다. 밥 냄새가 솔솔하니 코를 찔렀다. 해본 사람은 알지만 원래 전기밥솥 밥보다 냄비 밥이 맛있다. 그것도 밥하는 사람이 밥물과 뜸 불 잘 맞추는 사람이면 더욱 그렇다. 얼굴이 굳었던 상대를 힐끔 보니, 얼굴이 더 굳었다. 손님 있는데 사생활 하는 게 마음에 드는가? 그래봤자 뜨내기라 두 번 올 놈은 아니다 싶어 나는 마음놓고 반찬도 꺼냈다. 진석이네 가게에서 전기를 끌어다 연결한 자그마한 냉장고에는 내가 먹으려고 해 놓은 반찬이 차곡히 들었다. 아침은 여기서 해먹으니까 이러고 먹어야 한다. 밥을 푸고,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국을 내렸다. 오늘 아침은 된장찌개 백반이다. "뭐하는 건가?" 상대가 묻는다. 나는 숟가락을 챙겨들고 플라스틱 의자까지 가져와 당겨 앉았다. "아침 밥 먹수." "-거." 무슨 이야기를 하려다 말고 입을 닫는다. 쩝, 뭔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는 게 용건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뭐요?" 상대는 예쁜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입가에 있는 새초롬한 웃음 주름이 찡그릴 때도 생긴다는 게 신기했다. "밥도 파나?" 시킨 우동 반도 안 먹어 놓고 그런 소리를 한다. 나는 감히 내 밥그릇을 넘보는 손님 놈을 쳐다보다가, 고슬고슬한 흰밥으로 시선을 내렸다. 밥 냄새가 솔솔 나는 게 내가 봐도 너무 먹음직스럽고 잘 됐다. 면 먹다가 이런 밥 보면 회가 동하기도 하겠지. 오늘 하루를 거칠게 보낸 것 같은 이가 지친 목소리로 그렇게 물으니까 어쩐지 가엾다. 거울 보듯이 훤하게 그 인생의 서글픔이 눈에 보이는데 밥 한 끼 청하는 걸 내치자니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형은 의외로 인정이 많다, 라던 진석이 놈의 발측한 발언을 떠올리며 나는 어차피 쓴 인심. 이라고 마음을 다 잡았다. "드실라우?" "팔면 먹지." "팔지는 않고 거저 주기는 하지. 나 먹을라고 지은 밥 돈 받고 팔지는 않수." 숟가락 하나 더 얹어 주면서 무슨 생색을 낼라구. 나는 남은 밥을 닥닥 긁어서 퍼담고는 상대를 손짓으로 불렀다. 상대는 별로 좋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어지간히도 밥이 먹고 싶었던 모양인지 부르는 대로 따라 온다. 숟가락 하나 더 꺼내 얹어주고 나는 밥을 퍼먹었다. 계속 음식냄새만 맡고 있었던 데다 새벽이라 입맛이 없지만, 한번 입에 넣으니 의외로 술술 잘 넘어간다. 앞자리에 앉은 손님도 의외로 씩씩하게 밥을 잘 먹었다. 배가 고프긴 많이 고팠나보다. 나는 원래 밥 먹을 때 말하는 성격이 아닌데, 손님 또한 그런 모양이다. 둘 다 말없이 밥만 먹었다. "덕분에 잘 먹었군." 공으로 밥을 얻어먹어서 일까. 한 그릇을 십 분만에 뚝딱 비운 놈이 저 딴에는 예의바른 듯 인사를 했다. 잘 먹었습니다도 아니고 잘 먹었군이라니. 저 놈의 멍은 분명 저 입버릇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손님이 일어서더니 나갈 채비를 한다. 한번 사양했더니 진짜로 받아들인 듯, 계산은 정확하게 지가 시킨 만큼만 했다. 밥 먹느라 그랬는지 반 이상을 남겼어도 저나 나나 군소리는 없다. 밥 주는 놈이 최고인가 보다. 목례까지 하고 나가는 뒷 태를 보며 새삼스레 그 얼굴에 든 멍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내 취미의 최대 단점이 바로 이거다. 이리 저리 상상을 해봐도 그게 맞는지 틀리는 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손님에게 그런 걸 물어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끔가다 묻지 않아도 자기 사연 다 털어놓는 부류가 있기는 하지만 저 손님은 그 부류가 아닌 모양이었다.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고, 다문 입만큼이나 자기 관리도 단단한 양반. 그릇들을 치우면서 새벽이 걷히는 밖을 바라보았다. 아마 오늘 장사의 마지막은 저 손님인 것 같다. 조그만 단칸방으로 돌아와 불을 켰다. 얼마 전에 이사한 주택가 옥탑방이다. 내 나름대로는 업그레이드를 한 것인데 진석이는 노총각이 구질구질하다고 난리였다. 기둥서방도 아니고 웃음 팔아 사는 놈 집에 얹혀사는 것은 껄끄러운 일인데 녀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그 놈은 나를 완전히 제 동생 취급을 한다. 녀석이 뭐라고 하던 이 방은 옥탑방이래도 저번 지하방보다는 나았다. 퀴퀴한 습기가 사라진 것만 해도 어디냐. 작은 방이지만 사람 온기가 없는 터라 썰렁한 기운이 느껴진다. 재떨이를 가지고 창턱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웠다. 이제 막 사람들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새벽 여섯시의 아침공기는 잠이 깰만큼 맑고 선뜩하다. 아무래도 스모그로 의심되는 우중충한 회색 안개가 내려앉아 있어도 활기가 돌고 있는 바깥의 분위기를 바꾸지는 못하는 듯 하다. 저런 걸 보고 있으면 문득 내가 살고 있는 삶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뭔가 다르게 살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어쩐지 모르게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하지만 고등학교도 미처 졸업하지 못한데다, 사고 쳐서 교도소까지 갔다 온 인간에게 선택의 폭은 그렇게 넓지 않다. 어머니가 하시던 포장마차를 이어가는 것으로 입에 풀칠을 하는 것이 고작일까. 고등학교 때 같이 놀던 놈들이 꼬신 적도 있지만 나는 그 길로는 가지 않았다. 작부하면서 기둥서방 만나 모질게 고생만 하다가, 자기 몫의 포장마차 하나 장만하고 뿌듯해 하던 그 불쌍한 여자가 생각나서 못했다. 서방 복 없는 년은 자식복도 없다더라고 교도소에서 나온 날 자식을 앞에 두고 홀로 깡소주 마시던 그 여자는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던 깡패 짓을 아들이 업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면 지하에서라도 돌아누울 터였다. 여자 혼자 몸으로 날 키워줬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나서 더 애틋해졌다. 자기가 고생하는 것보다 자식새끼가 고생하는 게 더 서럽다던 그 여자는 팔자가 더러워서 그랬지 착한 여자였다. 그 여자가 그렇게 죽을 때까지 고생한 것은 나 때문이었다. 조져도 병신같이 있는 집안의 자식을 조지는 바람에, 그 여자가 평생을 걸쳐 장만한 전셋집을 홀랑 날려버린 것이다. 그래도 합의를 못 봐서 자식을 교도소에 보내야 했다. 사나이 젊은 혈기에 치른 일이라 하기엔 다 자라서 어머니에게 지운 빚이 너무 크다. 입맛이 썼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항상 그 여자 생각이 났다. 이 나이가 되어서는 더욱 어머니는 낳아주신 애틋한 존재가 아니라 고생만 하다간 불쌍한 여자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자기 인생을 하나도 못 살았던 여자였다. 지금이 어느 세상이라고 자식새끼 뒷바라지에 평생을 골골거리던 여자다. 키워준 것이 고마운 만큼 고생시킨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나는 얄미운 여자가 좋다. 자기 것 확실히 챙기고 없다고 사람 무시하고 그런 여자들이 오히려 보기가 좋다. 희생만 하다간 우리 어머니처럼 살다가 죽는다. 한번 있는 인생을 그런 식으로 사는 건 낭비라고 생각한다. 담배를 비벼 끄고 이불을 폈다. 씻는 것도 귀찮고 우선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 아무리 잠을 퍼 자도 밤잠을 안자면 몸이 무겁다. 머리가 땅에 닿으니 잠이 쏟아졌다. 이불을 덮다 말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가장 완벽한 아침 02 회색 스웨터에 모직 바지를 입은 놈은 제법 있는 집안의 외동아들처럼 보인다. 저 놈이 알콜 중독 아버지한테 얹어 맞고 자랐고, 캬바레 클럽 가수이던 놈의 어머니가 클럽 웨이터랑 배 맞아서 달아나는 바람에 우리 엄마가 불쌍하다고 거둬 먹였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조차도 녀석의 그런 모습에는 깜빡 속아넘어갈 것 같다. 사람 생긴 태가 사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어쩌면 이쁜 상판 보면 드는 호감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진석이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꽃처럼 잘 컸다. 얼굴 이쁜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이미지 자체도 서글서글 호감가는 호남형이다. 그런데 그렇게 잘 자란 것은 겉모양새뿐이다. 속이 어찌나 들들 꼬였는지 마치 꽈배기 같다. 가끔은 나조차도 감당하기가 힘들 정도다. 게다가 호빠는 그만뒀지만 화류계를 떠나지는 못했던 진석이는 회원제 클럽인지 뭔 지에서 돈 벌어서 자그마한 칵테일 바를 차렸다. 여자를 잘 물었는지 어쨌는지, 술 들어가면 별별 소리를 다 하는 놈이 출세비결만은 이야기 해주지 않았지만 이 자릿세 비싼 동네에서 칵테일 바 하면서 먹고사는 놈 아니었으면 나도 이렇게 편하게 장사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이 바를 곁에 끼고 장사하는 덕에 전기도 끌어다 쓸 수 있었고, 수완 좋은 진석이가 손을 써줬는지 조폭 똘마니들도 잘은 건드리지 않는다. 모르는 놈들은 나를 진석이의 친형으로 알고 있다. 그런 오해를 할 만큼 야무지기 그지없는 진석이가 나한테는 제법 잘한다. "염병할. 기세 등등 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 쉽게 따먹히고 지랄이냐. 병신 같은 것들이." 그렇게 잘하기는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사람 속을 다 뒤집을 때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자는 사람을 두들겨 깨워놓고 욕설부터 내뱉고 있는 놈을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놈은 나를 무슨 스트레스 해소용 자위기구 쯤으로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 듯 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엄마한테 고해바치는 아이처럼 조르르르 달려와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이다. 남이 자건 말건 상관 안하고 두드려 깨워 자기 이야기부터 듣게 만든다. 고약한 버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것들한테 들어간 돈이 얼만데. 씨팔. 비리비리한 것들이 뜯어가기는 남들의 배로 뜯어가더니. 나와바리(구역) 관리도 못하는 덜 떨어진 새끼들이 각 잡는다고 지랄을 떨어. 에라이." 장판 바닥에 침이라도 뱉을 기세다. 따다다다 이어지는 녀석의 악다구니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나는 입을 열었다. "야." "왜?" "뭣 때문에 그러냐." 뭣 때문에 그렇게 난리를 치는지 이유라도 알아야 내가 화풀이를 들어주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렇게 느닷없이 와서 깽판을 부리면 아무리 마음 좋은 - 좋아진 - 나라도 그렇게 즐겁진 않다. "형은 이야기도 못 들었어?!" 녀석이 고함을 빽 지른다. 아. 내가 성격 진짜 많이 좋아졌지. 나는 방금 전까지 내가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녀석에게 상기시켜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놈은 나의 한심스러운 시선을 마주하더니 그제야 흥분을 좀 가라앉혔다. 놈은 각선미 자랑이라도 하듯이 온 방안을 서성이던 것을 그제야 멈추고 내 앞에 철퍽 주저앉았던 것이다. "어제 나와바리 전쟁 일어났었어. Doll house에." 돌 하우스는 이름만 들으면 웃기지만 사실은 안 그렇다. (사실 나는 처음에 그 이름을 듣고 무슨 나이트 클럽 이름이 돌집이냐 하고 비웃었다. 근데 대학 물먹었다는 진석이 놈이 인형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사람을 구박했다. 하지만 인형집이나 돌집이나 웃긴 건 마찬가지다.) 이 동네 나와바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트 클럽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반대편에 있는 이쪽은 꽤나 조용했었는데? 이야기를 듣다보니 의문이 든다.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구역전쟁이 났었던 적은 이제껏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상구파가 먹혔단 말이야. 그 새끼들에게 처들인 돈이 얼만데. 이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잖아." 물장사라고 하기보다 색시집에 가까운 녀석의 업소를 생각하면 녀석이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법적으로는 칵테일 바라고 되어 있지만, 형식으로 보면 일본에 있는 스낵바인가 뭔가 하고 비슷한 거라고 녀석이 말한 적이 있었다. 수진이나 민희 같이 고정적으로 나오는 애도 대여섯 되고 아르바이트하는 애들도 몇 된다. 2차까지 나가야 돈이 된다고 수진이가 말한 적이 있으니까 진짜로 색시집이다. 가게 안에서 주무르는 것만 덜 할 뿐 사실은 같은 것이다. "임상구 이 개새끼. 별 그지 같은 게 갖은 포악을 다 떨더니." 녀석은 말을 하다 말고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욕을 해댔다. 하긴. 얼마 전이 수금 날이었다. 기백을 해다 바쳤는데 또 바치려고 하면 열이 뻗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원래 나와바리가 바뀌면 기강 잡는다고 바짝 조이는 것이 조폭들의 습성이었다. 안 그래도 불경기라 장사가 덜 된다고 - 안 된다고는 말하지 않는 게 녀석다웠지만 - 투덜거리던 놈이었으니 얼마나 뼈가 시릴지는 불 보듯 훤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누가 주인이라더냐." 사안을 보아하니 화를 받아줘야 할 것 같아서 졸리는 눈을 비비고 애써 바로 앉아줬다. 저 새끼 저 성질 안 풀고 보내면 애꿎은 애들이 죽어나간다. 민희나 수진이가 마스카라 줄줄 흘리면서 포장 걷고 들어오는 꼴 안 보려면 지금 잠깐 고생하는 게 났다. 진석은 불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일산파." "이번엔 무슨 일산이냐?" 김일산? 이일산? 박일산? …조폭들 이름은 왜 그렇게 촌스러운지 모르겠다. 상구파의 두목 임상구를 생각하면서 나는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어울리던 친구들 중에서도 유독 이름이 촌스러운 놈들만 그 길에 뼈를 묻었다. 권양호나 지철수가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일산에서 생겨서 일산파래잖아. 일산에서 생겼으면 일산에서 있지 뭐 먹을게 있다고 서울까지 기어올라와. 요즘 거기가 제일 짭짤하다던데." "여기도 짭짤은 하지." "형은 지금 누구 약올려?" 무한 팽창의 논리가 조직의 기본 원리다. 자라지 않으면 죽는 게 조직이었다. 전국구라는 게 괜히 생기는 줄 아나? 더군다나 새로 생긴 신규조직이라면 서울의 노른자위가 갖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저도 알고 나도 아는 진리를 새삼스럽게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은 제가 제법 열이 받았다는 소리일 테지만 일을 저지른 사람도 아닌데 닦달을 당하고 있기는 너무 억울하다. "그래서. 그쪽에서 연락은 왔어?" "가게 나가봐야 알지." 조직들이 기강이니 뭐니 하면서 저지르는 만행들이 워낙에 끔찍한지라 진석은 눈살부터 찌푸리고 있었다. 사람 비위 맞추기는 그야말로 입안의 혀처럼 해대는 진석이었지만, 저라고 그게 좋아서 하는 짓은 아닌지 한동안 상대 앞에서 설설 기어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녀석이 화를 내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한 달에 두 번 내야 하는 상납금 - 게다가 얼마나 더 뛸지는 알 수 없다. - 과 새로 오는 관리자 분들 비위 맞추느라 자존심 죽여야 하는 괴로움. 손님은 돈 떨어지는 저금통이니까 비위 맞추는 거 당연하지만 돈 뺏기면서 비위까지 맞춰야 하는 조폭들은 녀석에겐 정도 이상의 골칫거리다. "밥은?" "속상한데 밥이 넘어와?" 시계를 보니 얼추 네 시다. 보통은 다섯 시쯤에 깨니까 한시간 정도만 손해 본 셈 치면 되겠다. 나는 자리에 다시 누웠다. 하루에 열 시간 가까이 자도 밤잠을 못 자는 몸은 늘어진다. 십년이 지났으니 몸에 익을 만 한데, 익지는 않고 오히려 피곤이 쌓이는 것만 같으니 천상 이 짓도 오래는 못할 성싶다. "해장국 시켜." "밥 안 해줘?" "수진이나 시키던지. 내가 니 식돌이냐." "아, 밥 먹으려고 왔는데." "나라고 내 손으로 해먹고 싶겠냐. 니가 좀 해봐라. 응?" 녀석의 도무지 늘지 않는 음식솜씨를 알면서도 내가 말했다. 나야 어머니 도우면서 간간히 배웠다지만 혼자 살아도 외식이 일상이었던 녀석은 그야말로 라면물도 못 맞추는 수준이었다. 텔레비전 같은데 보면 계란 프라이도 못해서 다 태우는 새댁 같은 애들이 나오는데, 눈앞에 있는 이 놈도 완전히 그 짝이다. 그런 애들은 곱게 자라 그랬다지만 굴러먹기는 있는 대로 굴러먹었던 놈이 생존 필수 조건도 못 갖추고 있으니 가여운 노릇이었다. "수진이가 음식 잘하잖아. 수진이더러 하라고 해." 나는 음식을 하긴 하지만 잘은 못한다. 파는 음식을 하는 터라서 음식간이 거의가 평균적이다. 길가다 아무 음식점에나 들어가서 시키면 나올 수 있는 딱 평균적인 솜씨라서 내가 해먹고도 질릴 때가 있다. 반면에 수진이는 음식을 꽤나 한다. 여자라서 그런건지 천성이 그런건지 지지고 볶는 걸 좋아해서 우리 어머니 제삿날이면 필수적으로 필요한 일꾼인 것이다. 그리고 진석이도 그걸 아니까 그 날만은 수진이가 일수 안 찍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걔가 종업원이지 식모야?" "그럼 나는 식모냐? "내가 형에게 해주는 게 얼만데 그깟 밥 좀 해주는 게 그렇게 꼽냐?" 녀석이 유세를 한다. 이 녀석은 만년 적공도 제 입으로 깎아먹을 놈이었다. 가만있으면 고마워 할 일을 지가 저렇게 생색을 내니까 내가 떨떠름해 하는 거다. "누가 해 주라든?" 녀석 덕에 편하게 장사를 하긴 하지만 빚지고 사는 성미는 못 된다. 더군다나, 남이 나한테 빚 지우려는 건 못 참는 성미다. 내가 들어도 짜증날 만큼 뻔뻔하게 대꾸를 하니까 괜시리 생색을 내던 녀석은 본전도 못 건졌다는 얼굴로 쳇 하고 혀를 찬다. "아씨. 됐어. 젠장할." 녀석이 팩 토라졌다. 참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몇 년을 같이 있던 수진이조차 '진석 오빠는 너무 차가워서 서글퍼요.' 따위로 이야기하고 있는 판국이지만, 내가 보기엔 그 사람들 전부 저 놈 껍데기에 속아 넘어 간 게 틀림없었다. 말끔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녀석이 차가운 게 서글프게 보이는 거지, 저 놈 얼굴이 떡판이었으면 못 생긴 게 성질도 지랄 같다고 욕설이 났을 것이다. "누룽지 끓일 건데 먹을 거냐." 놈이 비죽하게 입을 내밀고 구석에 쳐 박혔다. 한 대 패주고 싶기는 한데, 저 들들 꼬인 성격을 그렇게까지 몰아 붙였다간 또 폭팔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무서울 건 없는데 꽤 귀찮다. 방구석에 처박혔던 진석이 놈이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방금 삐졌으면서도 대답 안 하면 내가 안 준다는 걸 아니까 대답은 꼬박하니 한다. "나는 끓이지 말고 그냥 줘. 그리고 냉장고에 안동 간 고등어 있던데." "…썩을." "그냥 놔두면 형 말대로 썩을걸. 구워 주라." 돈도 많은 놈이 강아지처럼 눈을 빛내면서 - 아니. 정정한다. 고등어에 눈을 빛내니 영락없는 고양이다. - 재촉을 해온다. 간만에 간 대형 할인 매장에서 한 마리에 팔천원씩이나 주고 사온 귀한 영양식인데 저 녀석에게 홀랑 뺏기게 생겼다. 못 먹고 자랐다는 티를 내려는 듯 고기는 제대로 못 먹는 놈은 생선은 무척이나 밝혔다. 그것도 흰살 생선이나 훈제연어 같이 고급스러운 거 말고 등 푸른 생선 쪽으로만. 일례로 저 망할 놈은 생선 좋아한다고 저번 생일상에 그 비싼 굴비를 사다가 큰 맘 먹고 구워 줬더니 동태찌개 안 해놨다고 지랄을 했다. 미역국은 없어도 동태찌개가 있어야 생일상이라나. 엄마가 없는 살림에 그렇게 차려줬더니 입맛이 아예 그리로 굳은 모양이다. 썩을. 저건 어째 해줘도 저 모양인지. 저렇게 빈궁하게 굴면 손님들이 안 좋아할텐데 저 놈은 굳이 저렇게 제 식성을 고집한다. 돈 안 들어 좋다고 해야 할지 귀찮아 죽겠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혀를 차면서 부엌으로 갔다. 대꾸는 없었지만 놈한테 먹는 걸로 원한을 사면 무섭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나다. 특히나 생선 가지고 그런 건 저 놈과 영영 척을 지리라 벼르지 않고서야 할 수가 없는 수작이다. 냉장고에서 고등어를 꺼내드니까 좋은 모양이었다. 퉁하니 토라졌던 놈이 슬그머니 방 중앙으로 다가와 앉는다. 쯧쯧. 혀를 찬 나는 비닐에 넣은 고등어를 그대로 물에 넣어 두었다. 해동하게 두려면 시간이 좀 걸려야 할 테니까 다른 거나 좀 해야 하지 싶다. 어쩔까나. 허리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등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콩자반 없더라 형." 화났다며? 씩씩대며 열 불 낼 땐 언제고. 아니. 그 이전에. 너 내 집에 들어오면 냉장고부터 훑는 거 그만 하라고 하지 않았냐. "그건 얼마 전에 해 뒀어. 식품실 안 쪽에 있다." "형은 치사하게. 나 가져가지 마라고 숨긴 거야 설마?" 녀석이 답지 않게 비죽이는 목소리를 하고 말한다. 나는 혀를 차며 놈을 돌아보았다. 밑반찬을 둘러보았다는 것은 즉, 얼마 전에 쓸어간 음식들이 다 떨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외식도 많이 하는 놈이 반찬은 얼마나 많이 쳐 먹는지 그 밑반찬을 해댈려면 허리가 휠 지경이다. "당연하지 새꺄. 내가 니 친정 엄마냐. 내가 왜 니 밑반찬을 해다 날라야 하는 건데? 시장가면 다 만들어서 천원 단위로 팔아. 해먹을 자신 없으면 사다 먹으면 될 거 아니야?" "그거랑 형이 한 거랑 같아?" "다르지. 그쪽이 더 맛있을 거 아니야. 정 먹고 싶으면 수진이에게 해달라고 그래. 피곤한 애 시키는 게 안쓰러우면 웃돈을 얹어 주던가. 밥 잘하는 기집애 옆에 두고 왜 날더러 그 성화야." "아. 거 치사하고 더럽네." 놈이 웅얼거렸다. 나는 놈을 매섭게 돌아보았다. "더러우면 처먹지 말던가." "먹는 것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니야. 사람 서럽게 왜 그래." 놈이 반박을 한다. 오늘따라 이것이 왜 이렇게 쨍알이야!! 주는 대로 고이 먹을 것이지. 나는 벌컥 화가 났다. 그렇지 않아도 잠에서 깨워져서 기분이 나쁜 판에 칭얼대는 수작까지 들어주려니 성질이 뻗혔기 때문이었다. "먹는 거니까 이러는 거지. 꼴도 보기 싫은 놈 뭐가 이쁘다고 음식해서 거둬 먹여. 따슨 밥 먹고 남의 집 유부녀한테 쉰소리나 할 제비새끼한테." "-아씨." 말을 꺼내놓고도 아차 싶었다. 저 새끼는 몸 팔아 먹는 주제에 제비 새끼라고 불리는 걸 젤 싫어한다. 지네 엄마 꼬여간 웨이터가 웨이터가 아니라 사실은 캬바레 뛰던 제비였다는 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바람처럼 방을 빠져나간다. 실수 했다 싶어 잡으려고 했지만 놈의 행동은 워낙에 날랬다. "야. 진석아. 야!! 연진석!! 이 눔시키. 밥 먹구 가라!!" 하지만 놈은 대꾸가 없었다. 대꾸대신 투다다닥 하고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소리만 요란하다. 이제 서른이면서 하는 짓은 완전히 열 다섯 살짜리 애다. 나는 삐져서 가버린 놈의 뒷 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진짜. 누가 제비 새끼 아니랄까봐 삐지기는 오지게 잘 삐져요. 저 성질 머리를 가지고 어떻게 아줌마들 비위를 맞출까 모르겠네. 가장 완벽한 아침 03 "누가 오기로 했냐?" 놈이 물었다. 공짜라고 부실하게 만 것도 아닌데 들어앉자마자 고개를 박고 먹어 치운 우동그릇에는 국물조차 안 남아 있는 상태였다. 학생 때 운동이니 뭐니를 했다가 깨어진 화염병 조각에 잘못 긁혀 목에 섬뜩한 흉터 자국이 있는 태규는 내 중학 동창생이다. 대학 때 했던 운동말고, 중 고교 때 했던 운동으로 몸매가 다부진 놈은 목에 한 칼 먹기까지 해서 잘못 보면 영락없는 조폭 똘마니였다. 진짜로 그쪽 물에서 놀고 있는 놈보다 폼은 더 그쪽 같은 것이다. 나는 오뎅 몇 개를 더 떠서 그 앞에 놔주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에, 이 시간이 될 때까지 코빼기도 안 비치는 속 좁은 놈을 향해 나지막하게 투덜거렸다. "진짜로 삐진 모양이군 이 자식." 놈의 눈꼬리가 휘었다. 겨우 그 정도의 말만 가지고도 내가 기다리는 놈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하긴. 내 주위에 있는 놈들 중에 삐지고 말고 따위의 어휘로 형용이 가능한 놈은 그 자식뿐이긴 하다만. "이쁜이 오기로 했냐." 선우태규. 발음도 하기 힘든 얄딱 꼬리한 이름을 가진 놈은 H 신문사의 사회부 기자다. '진짜로' 대학에 가서 '정말로' 그럴듯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은 중, 고교 친구들을 통 틀어 이 놈 뿐이었다. 조폭으로 풀린 놈들 말고는,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진 놈도 몇 없을뿐더러 개중에서도 화이트칼라는 이 놈 외에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처음 이 놈이 신문사에 취직을 했을 때. 어떻게 저 무지막지한 놈이 기자씩이나 되는 거냐고 놈들과 만나면 한결같이 그 이야기만 했다. 허나 인간이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직장 덕인지 어렸을 땐 먹고 죽을래도 없었던 눈치가 꽤 늘어난 모양이었다. 놈의 알아듣겠다는 어투에 나는 혀를 차며 놈을 노려보았다. 그래. 알아듣겠다라는 표현까지는 좋다 치자. 근데 그 얄딱꼬룸한 시선은 대체 뭐냐? "왜. 꼽냐?" "꼽긴. 상부상조의 아릿다운 정을 이어나가는 이웃사촌을 보고 그런 감정을 가질 리가 있나." 빈정거리는 소리라면 듣기 싫었겠지만, 감정 없이 무미한 목소리도 듣기 싫기는 매양 한가지다. 놀리는 것도 아니면서 말 쓰는 꼬라지가 참 듣기 좋아서 나는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놈은 후룩 소리를 내면서 더운 오뎅 국물을 마셨다. "이번에는 진석이도 날카로울 거니까 괜히 심심하다고 애 건드리고 그러지 마라. 수습하기 귀찮아." 어제 구역이 넘어가서일까. 아가씨들 성화에 간식거리 사러 나오는 시다 조차도 뜸한 판국이다. 어제 당일은 모르겠던데, 오늘은 마치 거리에 계엄령이 내려진 것 같았다. 물론 물정 모르는 손님들이야 이 구역에서 떠돌고 있는 긴장감을 못 읽겠지만 장사하는 치들은 하다 못해 저 앞 편의점 주인마저도 신경이 곤두섰다. 태규는 입가를 슥 문지르면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왜 또 성질이 뒤집어 졌대." 성질 앞에 (지랄같은)이라는 형용사가 괄호치고 들어간 것 같은 어투인 것은 내 착각이 아닐 것이다. 나는 놈들이 서로에 대해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살가운 성격들이야 원래 아니지만 태규랑 진석이는 어째 상성이 좀 안 맞는 것 같다. 서로를 죽도록 싫어하거나 그러는 건 아닌데, 뭐라고 할까? 자기들끼리 꺼려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같은 말을 해도 상대에게 감정이 있어서 하는 말이 있고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이 있는데 둘의 경우는 대부분 전자에 속하는 방식으로 상대를 표현하곤 했던 것이다. 그것도 좋은 감정이 아니라 나쁜 감정 쪽으로. 중간에 낀 사람으로서 껄끄럽기는 한데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애들도 아니고. 서로 친하게 지내라고 해봤자 들을 것들도 아니고. "이번에 이 구역 주인이 바뀌어서. 근래에는 없던 일이라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야. -경찰은 몰라도 깡패는 끼고 해야 하는 장사니 신경 쓰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그 놈이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는데." "그래 봬도 오-너 아니냐. 포주질은 아무나 해먹는 줄 아냐." 나는 놈이 하는 이야기에 대꾸했다. 멀쩡하게 대학까지 잘 다닌 놈이 그 짓하고 산다는 게 마땅치 않기는 하지만, 지 인생 지가 산다는 데 뭐라고 간섭할 명분이 없어 그냥 놔두는 형편이었다. 처음. 한 세 달쯤 없어졌다 돌아 온 놈이 그동안 호스트 짓에 빚까지 졌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만하더라도 가만있는 애새끼한테 바람 넣어서 남창으로 굴린 그 마담인지 뭔지 하는 년의 머리채를 조리 돌림해도 시원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말이다. 숨어 있어야 하는 처지인 주제에 그 기집년 찾으러 거리에 나서기까지 했으니 그 분노는 오죽했으랴. 내 인생에 오직 하나 후회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 직후에 빵에 잡혀 들어가 몇 년을 썩는 바람에 그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기집년을 패대기치지 못한 것이었다. 교도소에서 출감해서 보니 놈은 완전히 그 길로 빠져들어 도저히 몸을 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어 있어서, 나는 그제서야 내가 놈을 붙잡아줄 시기를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었던 것이다. 이제와 말을 해도 먹히지도 않을 처지니 입을 떼지야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풀릴 까닭은 또 없는 것이다. 망할 자식. 그렇게 똑똑한 척 온갖 유세를 다하면서 대학까지 들어가더니, 결국 하는 짓이 아줌마들 기갈이나 식히는 호스트냐. 나는 새삼스레 마음이 쓰려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놈 더러 남창이니 제비니 욕을 해대는 것도, 저가 그런 소리 듣기 싫어하다가 그런 일을 그만뒀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래도 정신 차리고 사는 것 같던 놈이 결국 발을 못 빼고 이 뒷골목에서 주저앉고 말았다는 게 가장 속상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했으면 눈앞에 있는 이 선우태규처럼 아예 이 세계랑 상관없어 질 수도 있었던 놈이었는데.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 꼴이 된 놈의 꼴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거도 사람 나름이지. 연진석이라면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살아도 되는 군번 아니던가. 이 동네 세력권이야 어차피 빤한데." 식후 땡인가. 짙고 쌉싸름하게 독한 향이 나는 시나브로를 입에 물고 태규가 중얼거렸다. 놈의 짙고 검은 눈이 무언가를 생각하듯 가늘어진다. "무슨 소리냐. 이번에 이 동네 구역 따먹은 놈들은 일산판가 뭔가 하는 놈들이라던데." 그쪽에서 도는 놈들 몇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현장에서 뛰는 태규만큼의 정보가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포장마차 주인이 그런 걸 신경 쓸 일이 없기에 요 근래는 만사가 무심한 형편이었다. 구역 주인이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만한 일은 없었다. 이 동네 세력권이 간신히 하나 있는 포장마차더러 유세할 정도로 영세하지는 않으니, (게다가 고맙게도 수완 좋은 연진석이 놈이 바리어까지 쳐주는 형편이니) 가게 가진 사람들이야 살이 떨려도 나는 그저 그런가 할 뿐이었던 것이다. 가끔 들리는 똘마니들의 상판이야 달라지겠지만 그 성격이야 빤한 거고. 태규는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재떨이에 담배를 떨었다. "그거야 이 거리 잡는 놈들의 이름 정도가 바뀐 거뿐이고. -안 들리는 모양이니 됐다.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일이니." 놈이 중얼거린다. 굳이 그쪽으로 시선을 안 돌리려고 하고 있는 것은 맞기에 나는 놈의 말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앞으로는 그쪽하곤 연관 없이 살고 싶은 기분인지라 진석이 입에서 어쩌구 파가 튀어나와도 이름 정도 외우는 게 고작이다. 한참 놀 때도 그쪽하곤 얽히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었는데 이제와 그쪽에 시선 돌릴 처지는 더욱 아니다. "잘 먹었다." 놈이 일어났다. 탄탄한 체격에 거친 옷을 꿰어 입은 놈은 남의 영업장에서 먹고도 태연하게 그냥 일어난다. 원래 퍼주는 장사는 안 하지만, 그렇다고 놈에게 돈을 받을 생각은 또 들지 않는 지라 나는 또 그러려니 했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를 때 붙어 같이 뛰어 다녔던 놈이었다. 우동 몇 가락 말아줬다고 생색낼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 아닌가. "제열아." "왜." "김밥 좀 싸라. 오늘은 청에서 밤새야 하니까." 나는 알루미늄 호일에 김밥 네 줄을 싸서 놈에게 던져 주었다. 검은 봉다리 안에 김밥을 넣은 놈이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포장을 들춘다. 저게 그나마 잘 먹겠다는 표식이다. 싱거운 자식. 이 구석진 골목까지 온 주제에 우동 한 그릇 오뎅 몇 개 먹고 그냥 일어나는 놈의 무뚝뚝함에 설핏 웃음을 흘리던 나는, 빼먹었던 게 생각나 포장된 나무젓가락과 단무지를 챙겨 던져주었다. 야구하던 놈답게, 나이스하게 캐치를 한 놈이 봉지 속으로 그것들을 쑤셔 넣는다. "담에는 새벽에 와. 그때쯤은 밥 하니까." 놈은 다시 고개를 끄덕 한다. 일주일 내로 다시 올 것이다. 무표정한 놈의 얼굴에서도 대충 기색이라는 게 읽히는 까닭에 나는 놈이 뭣 때문에 내 눈에 눈을 한번 더 마주치고 갔는지 알 것 같았다. 진석한테 주려고 챙겨놓은 콩자반과 들깻잎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외식이 잦은 놈에게 밑반찬 대는 건 좀 아까운 노릇이라 싶어 그것까지 들려주고 싶은 마음은 꾹 참았다. 먹는 것도 잘 안 챙기는 부실한 애새끼들 때문에 나이 들어 식순이로 전락했다. 나는 오늘따라 뜨내기손님도 없는 포장마차 안에서 혼자 한숨을 쉬면서 생각에 잠겼다. 진석이 이 자식은 자기 생각해서 특별히 반찬통에 음식을 꼭꼭 쟁여 왔건만 아직도 들어올 생각을 안 한다. 어디까지 버틸지. 나는 어린애 같은 오기를 부리는 놈을 향해 픽하니 비웃음을 날리고 말았다. 새끼가 그래도 형님 한테니까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지. 나마저도 없었다면 그 놈 진짜 외로워서 어떻게 살았을지 모르는 노릇인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웃사촌. 먼 친척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옛 격언이 공언해준 사이였다. 차라리 낫다고 비교할 친척도 없는 천애 고아들이니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놈과 나는 마치 친 혈육처럼 정 붙이고 살아온 사이였다. 내가 저를 못 버리는 것처럼 저도 나를 버릴 수는 없다. 나갔던 기세를 그대로 품었으면서도 놈은 반드시 돌아오기는 할 거였다. 하루일지 이틀일지. 다만 그것이 문제일 따름이었다. 결국 오늘은 잠깐 들른 뜨내기 몇과 뒤늦게 간식 사러 나온 단골 둘 빼고는 파리 날리는 장사였다. 전기 빼고 뒷정리를 하면서도 조금은 난감한 생각이 든다. 며칠 이러는 거야 상관이 없지만, 한 주를 넘어가면 타격이 꽤 커진다. 나중에 조그만 분식집이라도 내려고 들어놓았던 적금은 어떤 일이 있어도 허물어서는 안 되는데, 전세방 옮기느라 가지고 있던 현금을 거의 다 써버려서 수중에 돈이 정말로 몇 푼 없었던 것이다. 남에게 빚 만드는 거 싫어하는 내 성미로 돈 끌어다 쓸 재주도 없고. 워낙에 가진 게 없는 소시민이다 보니까 작은 바람에도 이렇게 풍랑이 가득하다. 역시 돈은 있고 볼 노릇이었다. 주머니에 두 손을 꿰고 쓸쓸히 골목을 나섰다. 오늘 하루는 버틸 요량인지 진석이는 문을 닫는 이 시간까지도 끝내 얼굴을 내지 않는다. 쫀쫀한 자식 같으니라고. 나는 속으로 놈의 좁은 도량을 욕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지가 제비 새끼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 소리가 듣기 싫으면 그 짓을 하지를 말던가. "꺄악." 그렇게 혼자 진석이의 옹졸함을 씹고 있는데, 어디선가 병아리가 삐약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비명이긴 한데 워낙 작고 가냘퍼 순간적으로 뭔가를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현재 시각은 새벽 다섯시. 동까지 뿌옇게 떠오는 시점이라 길 가던 행인도 별로 없는데 이게 웬?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잘못 들은 거겠지 싶으면서도, 비명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어 신경이 쓰이는 판국이었다. 어디선가 들은 목소리지 싶었다. 내가 아는, 이런 목소리를 낼만한 젊은 여자가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째 그런 기분이 든다. "퍽." 그렇게 불길하게 귀를 곤두세우고 있는데 이번에는 또 치는 소리가 난다. 그에 이어 들리는 건, 또다시 병아리가 삐약거리는 것 같은 신음소리. 이번 건 확실히 환청이 아니다. 나는 설마하는 기분이면서도 지나왔던 골목을 돌아갔다. 내 가게에서 얼마 안 떨어진, 매나 고만고만한 술집들로 이뤄진 골목길에서 다른 골목길로 이어지는 샛길. 그러니까 어째서 이런 길이 나있는지 도무지 짐작이 불가능한 종류의 으슥한 길에서 아니나 다를까의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생머리를 길게 한 여자애가 머리채를 휘어 잡힌 채 어떤 놈팽이에게 얻어맞고 있는 것이다. "썅." 나는 입 속으로 가만히 욕설을 내뱉었다. 이 동네에서, 게다가 저런 차림으로 얻어맞고 있는 기집애라면 어떤 경황인지 눈치가 빤하다. 몸값으로 시비가 붙은 것이거나, 기둥서방에게 뜯기고 있는 중이라거나. 어쨌든 부외자가 중간에 끼어 들면 당사자가 더 고달파지는 일일뿐인 것이다. 그래도. 그걸 알고 있어도 그대로 못 지나가는 것은 나란 놈이 지금 저기서 맞고 있는 저런 여자의 배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어려서 어머니가 맞는 걸 워낙에 많이 보고 커서 그런지, 저런 처지의 여자가 맞고 있는걸 보면 괜시리 내 속이 다 쓰렸다. 예쁘게 보여도 세상에 닳고 닳아 대차고 옹골진 여자가 욕도 못하고 맞고 있는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오지랖이 넓게도 끼어 들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또한 그러한 까닭이다. 나는 길거리에 나뒹굴고 있는 맥주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어설프게 말렸다가는 여자가 더 봉변을 당할 확률이 높다. 이왕에 하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확실하게 해치우는 편이 낫다. "이 빌어먹을 년. 돈을 썼으면 갚아야 할 것 아니야?" "갚을게요. 갚을 거예요." 여자애가 엉엉 울면서 말했다.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애원하는 목소리가 진짜로 작은 강아지가 깽깽거리는 것처럼 작았다. 대충 하는 말투도 아니고 정말로 갚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이 동네는 진심이라는 것이 먹히는 곳이 아니었다. "말만 그따위로 했지 니가 언제 돈을 갚았냐. 이 허벌창아. 씹질로 이자 떼먹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내가 네 년 호군 줄 알아?" 말은 거칠지만 화가 난 기색인 아니다. 오히려 놈은 능글 거리는 기색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 놈이 여자애의 기둥서방은 아닌 모양이다. 어쩌다가 임자 없는 기집애를 잡아 기둥서방 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중인 모양 같은데. 하고 있는 꼴을 보니 여자애를 길들이겠다는 심산 같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여자가 아예 살붙이고 사는 인간이 아니면 그나마 뒷 탈도 적을 터였다. 놈이 여자애의 기둥서방이었으면 아무리 못 볼 꼴이라도 그냥 지나가는 게 여자애를 위해 나을 터인데 그래도 그 짓은 안 하게 돼서 다행한 노릇이었다. 그 뒷머리에 힘껏 병을 내리쳤다. 도구의 인간. 원래는 뭔 뜻으로 쓰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경우에는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길에 굴러다니는 게 도구니 굳이 맨손으로 힘 쓸 까닭이 없다. 제대로 맞았는지 놈은 소리도 못 내고 꼬꾸라졌다. 운동화 신은 발로 고양이 걸음 내면서 들어왔으니 여자 잡는데 한창 열을 내던 놈이 내 기척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쉽게 끝나는 구나. 나는 쓰러지는 놈의 뒷통수에 비치는 피를 내려다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려고 한 수작이었지만 너무 간단하게 쓰러지니 영 싱겁기까지 했다. 적어도, 여자가 갑자기 꼬꾸라지는 남자에게 놀라 눈물과 코피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올릴 때까지는 그 기분이 별반 달라지지는 않았다. 나를 알아보고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얼굴도 못 알아 봤을 뻔하게 부어 터진 여자애와 눈만 마주치지 않았더라도 내 마음은 그나마 평온했을 터인데. 허나 그 평온한 기분은 기집애의 눈에서 나를 발견하고 놀란 빛이 떠오르는 것으로 끝이었다. 빌어먹게도 새벽녘 길거리에서 봉변을 당하고 있던 기집애는 내가 아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나는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이 기집애가 왜 이런 봉변을 당하고 있었는지, 나는 감도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가장 완벽한 아침 04 오빠. 오빠. 그녀는 마치 내가 제 친오라비라도 되는 양 소매를 붙잡고 울었다. 몸 파는 계집애답지 않게 마음 씀이 약한 그 기집애가 당한 처참지경에 어이가 없어 그녀를 내려다보고만 있던 나는 잠시 후에야 정신을 수습할 수가 있었다. 니가 왜 이런 꼴이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애를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일 듯 싶었다. 그래서 나는 기집애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그 꼴을 한 애를 버스에 태울 수가 없어 택시를 탔더니, 택시 기사가 나를 천하에 잡놈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놈이 뭔 생각을 하건 전혀 상관이 없었던 나는, 내 소매를 붙잡고 엉엉 울고 있는 비참한 꼴의 계집애에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자기애들은 어지간히도 챙기는 게 진석이 놈이었다. 더군다나 이 기집애는 그 놈이 데리고 있는 고정 중에서도 인기가 있는 편이다. 아까 봤던 그런 놈들에게 장사 밑천인 얼굴을 맞게 내버려 둘 만한 사정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이건 그 놈도 모르는 사정이 있는 거다. 잠시간이지만 사태를 파악할 시간은 충분했다. 기집애를 방으로 끌고 들어와 우선 세수부터 하게 했다. 바닥에 긁혔는지 제법 예쁘게 차려 입은 원피스가 엉망진창이 됐다. 얼굴도 망가진 데다가 워낙에 울어서 기집애는 본디의 형상이 흔적조차 없었다. 병신 같은 기집애. 울긴 왜 울어! 나는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가, 심성이 여린 기집애의 성정을 생각하며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모르던 여자가 그런 짓을 당했다고 해도 열이 뻗힐 판에, 제법 아끼던 녀석이 그런 꼴을 당하고 왔으니 뒷통수가 당긴다. 덜 덜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왕년에 울컥하던 성미는 많이 죽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꼴을 한 기집애를 보고도 멀쩡할 성격은 아니다. 폐에 가득 차는 연기에도 진정이 되지를 않는다. 기집애가 한참 만에야 돌아온 게 나로써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기집애의 목을 딸딸 털면서 왜 그런 꼴을 당했느냐고 윽박질렀을 판국이었다. 끓어오르는 속을 간신히 삼키며 나는 찬물을 내 놓았다. 가지런하게 머리랑 얼굴을 닦은 여자애는 띵띵 부운 얼굴을 한 채로 내 앞에 옹송그리고 앉았다. 내 앞에서까지 겁먹은 듯한 태도라 더욱 화가 치민다. 나는 열이 치받은 머릿속을 정리하며 가능한한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물 마셔라." 움찔. 놀란 듯 몸을 굳혔던 여자에가 거의 보이지도 않는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담뱃재를 재떨이에 떨면서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새가 물을 쪼듯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물을 마시던 계집애가 쿨럭 기침을 하며 잔을 내려놓는다. 가녀리고 작은 흰 손이 콘크리트 바닥에 쓸려 생채기가 났다. 몸 파는 기집애가 제 몸 간수도 제대로 못하고. 그 꼴을 보던 나는 끝내 혀를 차고 말았다. "수진아." "오, 오빠." "돈이 왜 필요했어?" 내가 물었다. 기집애가 세수하러 간 사이에 정황을 되새겨보던 나는 거슬리는 점을 발견하고 말았던 것이다. 제법 큰 돈을 버는 녀석이었다. 진석이가 포주긴 해도 그렇게까지 악덕은 아니어서, 밑에 있는 애들도 몇 년만 하면 자기 가게 얻어 갈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수입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 중에서도 수진이 이 계집애는 가게 간판이라고 할 만큼 인기가 있는 아이다. 더군다나 사치를 하는 성격도 아닌데 난데없는 빚이라니. 순하다고는 하지만 없는 일에 그렇게 죽어지낼 정도로 무르지는 않는 놈이니까 놈이 한 말은 사실일 터인데, 도무지 사연을 알 길이 없다. "어, 어머니가-." "-아." …젠장. 거기까지 들으니 이제 사정이 환하게 보인다. 그 놈의 어머니. 나는 박꽃같이 소담한 수진이의 얼굴에 쌓인 근심이 무언지 뒤늦게 알아채고야 말았다. 아, 라니. 바보 도 트이는 소리도 아니고. "또 뭣 때문인데?" "…갑자기 상태가 더 나빠졌어요. 혈액 투석하시는데 돈도 없고. 중환자실은 무균실이라서, 따로 들어가는 돈도 있고. 게다가 간병인이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월급도 올려달라고 하고-.갑자기 큰 돈 들어가게 생겼는데 구할 데가 없었어요." 수진이는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미싱 돌리는 일이 업이었던 수진이네 어머니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미혼모였다. 시골 처녀로, 중학교 졸업도 못하고 서울에 올라와 미싱만 돌리다 열 여덟살에 공장장에게 강간당해 수진이를 낳았다. 처음에. 술에 잔뜩 취한 수진이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그 이야기하는 걸 듣고 나는 어디 드라마 대본을 가져다가 읽는 줄 알았을 정도였다. 워낙에 진부해서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스토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진부한 스토리란 동어 반복이 많이 된 일. 즉, 자주 일어났던 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버스 안내양 하다가 술집으로 들어섰다는 우리 어머니처럼, 수진이네 어머니도 그 진부하고 빤한 스토리대로 인생을 망쳤다. 그래도 그녀는 우리 어머니처럼 급전직하는 하지 않아서, 미혼모로 애를 낳고도 공장도 계속 다니고 했던 모양이었다. 수진이는 지네 외삼촌 호적에야 올랐지만 자기 집에서 의절당한 홀 어머니 모시고 혼자 컸었다. 이런 혼탁한 세상에 몸을 담고서도 순하기만 한 수진이처럼 마찬가지로 소처럼 우직하게 일해서 딸 키울 줄 밖에 모르는 어머니를 모시고서 말이다. 그런 그녀가 술집여자가 된 것은 또한 그렇고 그런 흔한 수순 대로였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경리로 일하던 그녀가 참하게 시집갈 생각을 버리고 술집으로 투신하게 된 것은 평생 고생만 한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셨기 때문인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신장병이었다가, 엎친 데 덥친 격으로 중풍이 왔다던가. 게다가 한번 무너진 몸의 밸런스 때문인지 줄줄이 사탕으로 엮이는 합병증이 몇 가지나 덧붙었다. 병원에서가 아니면 아예 살수도 없는 몸이 된 수진의 어머니는 그때 처음으로 울었다고 했다. 진석이는 수진의 사연이 신파 사연 베스트 1이라고 비꼬았지만, 그렇게 기가 막히게 진부하고도 기구한 팔자로 사는 사람도 실제 하기는 했다. 나는 눈앞에서 다시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는 수진을 기가 막힌 심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머니라. 내가 왜 그것을 잊고 있었을까. 그러고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는 진석이에게 일수를 찍고 있었다. 그 많은 수입 다 날리고도 모자라서 진석이에게 빚을 지고 있던 형편인 것이다. 진석이네 가게에서 녀석에게 일수를 찍는 여자애는 수진이 밖에 없었다. 짐이 된다고 해서 그녀가 어머니를 놓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답답한 기분에도 그녀에게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 심정이 되었다. 쉽게, 남이 말하듯이. 그렇게 그녀에게 어머니를 포기하라고 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오히려 남이 해주는 그런 식의 충고에 더욱 상처를 받을 것이 수진이었다. 그 성격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생채기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어머니는 세상의 전부였던 것이다. "진석이에게 이야기하지 그랬어." 나는 그래도, 그렇게 질이 나쁜 놈들에게 손을 내밀기까지 한 그녀가 답답해서 말했다. 자기 인생 망가트리려고 작정을 한 것이 아닌 이상에야,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쓰레기에게 책잡힐 만한 짓은 하지 않았어야 하는 게 옳았다. 그만큼 굴렀으면 아무리 백치라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쯤은 빤 할건데 그런 미련한 짓을 하다니. 진석이의 이름이 나오자 수진이는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미안해서 죽겠다고, 그녀는 울면서 속삭였다. "어떻게 그래요. 제가 사장님한테 진 빚이 얼만데요. 큰 돈 들어갈 때마다 손 벌렸어요. 이제는 억이 넘어가는데…사람이 염치가 있지요. 인두껍을 썼는데 어떻게 그래요. 그 돈이 어떤 돈인지 뻔히 알면서, 제가, 어떻게 그래요." "왜 말을 못해. 니 인생 니가 독하게 챙겨야지. 그 놈이 너한테 그 정도 투자를 한다는 건 너한테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거 잖아. 근데 왜 못해." 병신아. 착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 새끼가 번 돈이 지가 일해서 번 거냐. 니들 등쳐서 번 돈 아니냐. 나는 수진이 녀석에게 미안해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녀가 진석이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녀석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는 일이 싫은 모양인 듯도 했고. 노류장화가 정이 깊다고, 이쪽 애들은 한번 진심이 된다면 지독하게 헌신적이었다. 몸 팔아 살기는 하지만 마음은 팔지 않는다고 꼿꼿하게 말하는 것들일수록 진심이 되면 무섭게 순정적이 된다. 그 끝이 어떤 꼴이 될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한번 마음을 주면 돌아서지 않는 것이 이 아이들이었다. 그런 그녀가 진심을 품고 있는 상대가 바로 진석인 것이다. 그녀뿐만 아니라, 진석이네 바에서 일하는 여자의 반은 진석이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진석이랑 어떤 관계로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는 형편이었으니까. 자기네 포주에게 그딴 마음 품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 절대로 이해가 안가는 일이었지만, 그 애들은 진석이를 꽤나 진심으로 따르는 눈치였다. 장난삼아 '언니'라고 부를 정도니까 - 물론 대놓고는 안 그런다. - 그녀들이 진석에게 느끼는 친밀감은 일반적으로 포주에게 애들이 느끼는 감정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 분명했다. "가게 돌아가는 이치 뻔히 알아요. 우리 가게에서 수입이 나면 얼마나 난다고. 우리처럼 자기 버는 거 다 가져가는 애들도 없어요. 똑똑한 척 굴어도 우리 사장님이 얼마나 바본데. 저 그 분 등쳐먹는 짓은 못해요. 이제껏 진 신세도 다 갚지 못할 정돈데 더 어떻게 그래요." 바보는 너다. 이 계집애야. 기집애가 울면서 하는 말에는 한숨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착각도 유분수다. 니가 연진석이의 등을 처먹어? 하!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하고 있다 정말이지. 진석이가 고단수로 논다는 것은 알았지만 애들을 이렇게 완벽하게 세뇌시키고 있는지는 몰랐던지라 나는 입맛이 썼다. 그렇게 수입이 안 나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그 새끼 집은 어떻게 강남에 40평 짜리 아파트로 갖고 있고 차도 그렇게 고급으로 굴리고 다니냐. 니가 속은 거다 이 병신 같은 가시내야. 진짜 내가 어이가 없을려니까. "얼마를 빌렸는데?" 이 기집애를 붙들고는 더 이야기 할 기력도 없다. 지가 말 안 한다면 내가 해도 상관이 없지. 수진이가 빠지면 매상에 차질이 클 테니 놈도 이번 일은 수습해 주려고 할 것이다. 안 하겠다고 나서면 두들겨 패서라도 하게 만들 테니까 놈의 반응도 상관없다. 수진은 겁먹은 얼굴을 하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건 왜 물으시는데요?" "그런 놈들한테 얻어맞고 공짜로 대주면서 돈 빌리느니 나한테 빌리라고. 내가 우선은 갚아 줄 테니까 말해. 얼마야?" "…하지만 오빠도 돈 없으시잖아요." 기집애가 중얼거린다. 그래. 나 돈 없다. 내 돈 가지고 하는 일 아닌데 내가 생색내서 쪽팔린다만, 그래도 이 꼴보고 가만있으면 내가 우제열이 아니지. 나는 수진이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전에 살던 방 빼서 돈 남은 거 있어. 니가 이자만 제대로 쳐준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야. 얼마야?" "하지만 저 당분간은 이자 갚을 기력이 -." "진석이에게 하듯이 일수 찍어. 만원이든 이만원이든 날마다 그런 식으로라도 넣어주면 상관 안 해." "오빠." "길게 말하지 말고 불어. 얼마야. 어디서 빌렸어?" "…천 오백만원이에요. 저기…대연금융에서." 대연금융. 어쩐지 질이 나쁘다 했더니 그 쪽이냐. 나는 잇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어쩌다 고르고 골라 하필이면 거기냐. 그럴 정도로 절박했었어? 대연금융은, 말이 좋아 금융이지 순 사채집단이었다. 그 뿌리는 대정(大正). 큰 정의로움이라는 얼토 당토 않은 간판을 세운 전국구 조직으로 이 거리에서 쪼잔하게 다투는 일산파나 상구파 같은 놈들은 거기에 비교하자면 길거리 양아치의 수준이었다. …거기다 덧붙이자면 내가 교도소에 들어갔던 주요한 원인을 제공했던 곳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기 힘든 불구대천의 원수라고나 할까. 물론 그쪽에서도 나를 그렇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대정의 보스 집안인 백가 쪽의 혈육하나를 완전히 못쓰게 만들어 놓은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백승지. 제 배경만 믿고, 참하게 학교 잘 다니는 내 친구 여동생을 강간한 그 놈. 그 놈은 게다가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어린 기집애 골반을 부셔놔 평생 절뚝거리면서 걸어다니게 만들었던 개 쌍놈의 자식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열 받은 친구들이랑 그 새끼를 잡아서 관절 마디마디를 끊어줬었다. 귀하신 핏줄을 평생 걸어다니지도 기어다니지도 못할 팔자로 만들어 준 덕에 보복도 오지게 당했고, 사실 잘못하면 죽을 뻔하기까지 했었다. 교도소에 간 건 사실 경찰 쪽에서 우리를 살려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을 당한 여자애 네 집안이 행세 꽤나 하는 집안이었으니까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우린 젊은 나이에 뼈도 못 추렸을 것이다. '하필이면 거기란 말이지.' 내가 나서면 잘 될 일도 안 될 악연이다. 물론 십년도 넘게 지난 지금에 와서 나를 알아볼 턱이야 없겠지만 만사 불여튼튼이라고 했지 않은가. 아무래도 알아낼 만큼 알아내서 진석이한테 가보는 것이 낫지 싶다. 사교성 같은 건 아무래도 나보다 나은 게 놈이니까. 그렇게 마음을 먹은 나는 기집애를 잘 구슬려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사양은 했어도 저도 제가 벌인 일이 겁이 나긴 한 양으로, 내가 다독여주니까 이야기가 술 술 잘 나온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이번에는 내가 먼저 굽히고 들어가야겠구나, 하는 그런 하릴없는 생각을 했다. 그 놈이 한동안 유세할 것을 생각하니까 배가 아프긴 해도 아쉬운 것은 아무래도 이쪽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억울한 기분이 아예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자면, 수진이 책임져야 할 것은 놈이었다. 몸 망칠 빌미를 제공한 데다가 마음까지 홀랑 가져갔으니, 지켜줘도 지가 지켜주고 보살펴도 제가 보살펴야 할 판국이 아닌가. 놈의 관리 소홀인데 왜 내가 놈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는 건가 말이다. 하여튼 입이 방정이다. 내가 오늘 그 놈 심기를 긁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이야기하기 훨씬 편했을 텐데. 아니. 편하다 뿐인가. 어디에 정신 팔기에 애 사정이 그런 것도 몰랐냐며 구박도 할 수 있었을 건데. 스스로가 판 무덤이나 남을 탓할 수도 없어 나는 자기 스스로만을 탓했다. 이러게 사람은 한 치 앞을 모른다 그러는 모양이었다. 놈이 준 스페어로 문을 따고 들어갔다. 소위 말하는 금싸라기 땅에 자리잡은 진석이의 아파트는 말이 좋아 아파트지 지방에서라면 마당까지 딸린 저택을 사고도 남을 금값이다. 비싼 땅에 프리미엄 붙은 아파트인 것도 모자라 안에는 인테리어 디자이넌지 뭔지 하는 놈이 손을 대 완전히 호텔 수준으로 번쩍번쩍 했다. 들어와서 자고만 나가는 집에 뭔 돈지랄을 이렇게나 해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석이 지 돈 가지고 쓴다는데 뭐라 그럴 수가 없어서 그냥 놔 두고 있는 형편이었다. "뱀 허물을 벗지." 깔끔 떠는 외양으로는 상상이 안 되는 꼴을 해 놓은 모습에 나는 홀로 혀를 차고 말았다. 일을 못하면 만들지나 말던가.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애마냥 이렇게 같은 일을 해도 일거리를 늘리는 놈이니 내가 저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거실에서 지 침실로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 껍질을 벗듯이 하나씩 풀어내린 옷가지들은 꼭 성급한 연인들이 남긴 흔적만 같다. 나는 하나씩 옷가지들을 주워 올리면서 놈의 방문 앞까지 닿았다. 그리고 방문을 열어 보니 방문 안에는 팬티까지 떨어져 있었다. 실인지 옷인지 구분이 안가는 T백의 팬티. 어이구 싶은 마음에 그것까지 주워들어 빨래바구니에 갖다 놓고 와 놈의 침대 위에 올라앉았다. 벌거벗은 몸에 이불을 돌돌 만 놈은 마치 누에고치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아서 오만상 인상을 쓰며 자고 있는 놈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잠을 자면서도 뭐가 그렇게 힘겨웠던지 끙끙 앓는 소리까지 낸다. 귀를 덮은 색소가 옅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주었다. 얼굴이라는 것은 타고나는 것일까. 거칠게 자라기로는 나 못지 않은 녀석인데도 불구하고 놈의 뺨은 마치 어린 소년의 그것처럼 투명하고 보드라웠다. 남들보다 살성이 흰 편이긴 하지만, 정작으로 놈이 곱게 보이는 것은 피부가 희기 때문이 아니라 피부의 살성이 좋기 때문이다. 세상 고생을 하나도 안 해본 놈처럼 주름도 잡티도 없는 피부는 삼십이 넘은 녀석의 나이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게다가 생김생김 하나가 어찌나 제대론지, 사람마다 다 비슷하게 생겼을 귀조차도 더할 나위 없이 탐스럽게 보일 정도였다. 길고 매끄러운 목덜미하며, 단단하게 근육 잡혔어도 보는 사람에겐 어쩐지 유연하게 느껴지는 몸매하며……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놈의 목덜미에 박힌 이상야릇한 피멍 하나에 눈길을 박았다. 작은 꽃잎처럼 깨끗한 피부에 깊게 박힌 그 멍은 피부 밑에서 피가 터진 모양을 하고 있었다. 좋게 말해 키스마크고 일반적으로 말해 쪼가리다. 어쩐지 얼굴이 확 붉어진다. 가족이 벌이는 내밀한 정사를 눈앞에서 본 것처럼, 나는 동생 같은 놈의 몸에 남은 다른 사람의 흔적이 민망스러웠다. 어떤 여자인지 정말 힘도 좋았다. "야. 일어나. 야 연진석." 물끄러미 놈을 보고 있자니 온갖 민망한 생각이 다 떠돈다. 더 이상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서 놈의 몸을 흔들었다. 앓는 신음을 내면서 자고 있는 놈에게는 안됐지만, 나는 놈을 두고 이런 저런 엄한 생각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여동생도 섹스를 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팔불출 오라비 마냥, 놈이 어떤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뻔히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놈의 몸에 남은 자국이 당황스러워지는 것이다. 빨리 깨우려고 마구 흔들었더니 애가 얼떨떨해 하면서 눈을 떴다. 길고 긴 속눈썹이 껌뻑거리며,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보려고 애쓴다. 어벙하고 바보스러워 보이는 그 얼굴에서 붉은 빛이 도는 입술 하나만 유일하게 맑았다. "…뭔데 형. 이 아침부터." 놈이 궁시렁거렸다. 내가 놈보다 잠이 많아서 놈이 나를 깨우는 적은 많았어도 내가 놈을 깨우는 법은 드물었다. 투덜거리면서도 뭔 일이 있기는 하다고 여긴 모양인지 몸을 세워 침대에 앉는다. 그 바람에 몸을 덮은 시트가 흘러내려 놈의 벗은 상체를 드러냈다. 별 다를 것은 없는데, 갈비뼈 아래쪽에 남은 붉은 자욱 하나가 다시 눈에 걸렸다. 참 어지간한 여자였던가 보다. "아침 아니야. 벌써 오후 세시다." "나 아침 열시에 집에 들어왔어. 좀 자면 안 돼?" 잠이 아직도 덜 깬 모양인지 놈이 제법 온순하게 투덜거렸다. 보통 가게 문 닫으면 네시쯤인데 열시에나 들어왔다는 것은 역시나 저도 2차를 뛰었다는 소리가 된다. 나는 놈의 벗은 등을 손바닥으로 철썩 치면서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안 돼. 일어나. 할 이야기 있어." "…설마 이거 어제일, 복수하는 거야?" "웃기고 있다 땅콩만한 자식이. 니가 나한테 복수당할 거리라도 되냐." 놈이 지 눈을 비비면서 이제야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정신이 그나마 좀 돌아오나 보다. 나는 놈이 세수하고 나오게 자리를 비켜줬다. 내 속을 뒤집으려고 작정을 한다면야 다시 자리에 눕겠지만,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지 놈의 집에 손수 들러주시기까지 하셨는데 놈이 그럴 리는 없었다. 나는 놈이 씻는 동안 놈의 냉장고를 열어 가져온 찬 통을 넣어두었다. 이 놈의 자식은 대체 뭐 하러 이런 대용량의 냉장고를 샀는지. 생수 몇 개랑 맥주캔 몇 개 외에는 완전히 텅텅 비어 있는 꼬라지였다. 파출부 아줌마는 대체 뭐하길래 냉장고도 안 채워 놓는단 말인가. 살림하라고 돈 줬으면 돈 값을 해야지, 진석이 저 새끼가 흐리멍텅하다고 장 볼 돈 다 떼먹고 자기 배만 채우는 게 아닌가. 나는 집안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지 손으로는 커피물이나 간신히 맞추는 게 진석이 수준이니 집안 일은 필연적으로 파출부 아주머니의 몫이다. 그런데 이번에 바뀐 아주머니는 영악한 모양인지 집안 일도 대충이고 애 챙겨 먹이는 것에도 영 성의가 없는 듯 한 것이다. 집에서 하는 거라야 잠자는 것 밖에 없는 진석이니 지 돈 내고도 신경이 안 쓰이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쪽은 소시민이라 조금만 신경써도 할만한 집안일에 아줌마를 쓰는 것이 생돈 나가는 것 같이 아까운 판국이었다. 거기다가 일도 제대로 안하니, 내가 그 아줌마를 곱게 볼 리가 없다. "뭐해?" "밑반찬 좀 넣었다. 이 새끼 근데 왜 냉장고 꼴이 이 모양이야. 장은 도대체 언제를 마지막으로 안 봤는데?" 나는 놈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뭔 취향인지. 번들번들 거리는 검은색 벨벳 가운 하나만 달랑 걸치고 나온 놈은 소파에 께른하게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세상 좋은 도련님 같던 인상은 어디로 가고 퇴폐적인 기운이 물씬 물씬 풍기는 제비 새끼 하나만 눈앞에 남았다. 놈은 담배연기 사이로 가늘게 눈을 치뜨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지 살림인데 왜 신경을 안 써?" "아줌마가 알아서 하겠지." "쉽게 번 돈이라고 쉽게 쓰냐. 아줌마가 일 제대로 안 하는 것 같으면 뭐라고 말해야 할거 아니야? 썩을 자식아." 놈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는다. 아아. 이제 완전히 잠이 깬 모양이다. 소파에 등을 기댔던 놈이 등을 세우고 나를 차갑게 일별한다. 아침에 다짜고짜 두들겨 깨워 얼떨떨했지 놈이 원래부터 옛 원한을 잘 잊고 그런 놈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안다. 놈은 아직 잠겨서 낮은 목소리를 칼칼하게 높이며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남이야 돈으로 밑을 닦든 창문에 뿌리든. 형이 신경을 왜 쓰는데?" 내 몸 팔아 내가 쓰겠다는데 니가 왜? 환청까지 들릴 것 같지만, 사실 놈이 하는 말은 바로 그러한 뜻이었다. 아직도 삐졌구나 쪼잔탱아. 나는 앙심을 단단히 품은 것 같은 진석에게 이를 드러내 보였다. 아 글쎄. 그렇게 듣기 싫으면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이제까지 번 돈이면 지금 은퇴해도 평생 먹고살텐데 대체 뭔 영화를 보겠다고 나이 삼십이 다 되도 그 판에서 발을 못 빼고 앉았냐. 니가 여자라도 지금이면 퇴물 취급이다. 이제 몇 년만 더 가면 대포집 작부 노릇 밖에 할 일이 없는 노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왕에 쓸 돈이면 가치 있게 쓰라고 하는 말이다. 빌어먹을 놈아." "남이야 빌어먹든 몸 팔아서 밥 먹든 글쎄 형이 왜 신경을 쓰냐고!!" "개새끼가 지금 터진 입이라고-, 썅." 놈이 팩하면서 지르는 소리에 저절로 손이 올라갔지만, 차마 내려치지는 못한다. 저 새끼가 잠자리에서 오줌싼 죄로 지 아버지라는 놈팽이한테 얻어터진 후 질질 울면서 우리 엄마가 떠주는 간장밥을 먹고 있을 때, 나는 중학교 교복 차려입고 뒷골목에서 삥을 뜯었었다. 내 기억 속에서 녀석의 최초의 모습은 고물 고물하게 기어다니는 열 살짜리 애새끼로 벌써 사람 쳐서 피 내는 법을 알았던 열 다섯 살짜리 꼬맹이한테는 도무지 인간도 아니게 보이는 놈이었다. 마치 강아지라도 귀여워하듯이 형아 형아 거리고 쫓아다니는 놈에게 과자도 쥐어주고 사탕도 물려주고는 했지만, 고 쪼꼬만 거에 손 댈 데가 어디 있다고 패고 그래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눈앞에서는 닳고닳은 꼬라지를 하고 다리 꼬고 앉은 놈인데도 머릿속에서의 놈은 크다란 눈에 눈물 그렁히 달고서도 내가 사주는 쫄쫄이 하나에 딸꾹질을 멈추던 열살바기 어린애였다. 이걸 쥐어 팰 구석은 또 어디 있냐 그래. 나는 치미는 울화를 간신히 참으면서 생각했다. 비록 패게? 어쭈. 패봐라? 라고 하는 듯 눈썹을 외로 꼬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놈의 눈길이 비위 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참자고 애쓰며 나는 숨을 삭혔다. 이 새끼 이런 성질인 거 하루 이틀 알았던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지금은 그보다 더 큰 용건이 있지 않은가. "연진석이." "왜?" "사람 참을 때 눈 깔아라. 장사 밑천에 금가기 싫으면." "-하." "형이 좋은 말 할 때 들어라. 진짜로 손 올라간다." -참으려고 했는데. 정말로 참고 싶었는데. 놈이 비죽히 짓는 얄미운 표정에 순간적으로 핀트가 나간다. 정말로 화가 나서 도리어 차분해 진 목소리가 된 나는 놈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경고했다. 허나 나도 내 성질 있듯이 진석이 새끼도 자기 성질이 있다.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나를 꼬나보는 꼴이 반항기가 역력한 기색이다. 나는 수를 세었다. 눈 깔라고 했다. 하나, 둘. 셋을 셀 때까지도 놈은 치뜬 눈을 가라앉히지 않는다. 나는 불끈 치밀어 올라 놈에게 달려들었다. 오냐 해보자 이거지. 달랑 가운 하나 입은 새끼가 작정을 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내가 이 자식 버르장머리를 못 고치면 성을 간다. 나는 이를 바득 바득 갈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 감상, 소중하게 읽고 있습니다. ㅜㅜ 정말 감사 드립니다. 새연재를 축하해주시는 분이 계시다니요. 저 정말, 감격했습니다. (네. 제 죄를 제가 압니다.) 가장 완벽한 아침 05 "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놈이 퉁퉁 부운 얼굴을 하고 투덜거렸다. 그렇지만 처음에 내게 덤비던 기세나 오기는 다 죽고 없었다. 주먹질을 오지게 했다면 차라리 아직도 화 낼 기력이라도 남았겠지만, 내가 놈에게 한 응징은 놈이 독기를 품기엔 너무 황당한 것이라 놈은 오히려 어이가 없는 눈치였다. 나는 밥을 푸다 말고 놈을 돌아보았다. "한번 애새끼는 영원한 애새끼다. 한번만 더 개겼다간 그 놈의 아가리 아주 찢어 놓을 테니까 찍소리 하지말고 밥이나 쳐 먹어." 얼음주머니를 양 볼에 대고 있던 놈은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쳇 하교 혀를 차고 말았다. 내가 아주 작정을 하고 잡아 당겨선지 사이 좋게 나란히 시커먼 멍이 든 뺨은 아주 볼만한 형상을 하고 있는 채였다. 저걸 주먹으로 팰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발로 걷어차자니 애 몸이 염려되고. 그래서, 놈이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양 뺨을 아주 죽어라고 잡아 당겼던 나는, 완전히 놈을 애취급을 하고 난 까닭으로 기세가 등등해진 상태였다. 한편으로 진석이 놈은 몸보다는 정신적으로 충격이 컸던지 어째 영 우울한 기색을 하고 있었다. 하긴. 나이 서른이 되어서 대든다고 양 볼이 찢어져라 잡아당겨진 까닭에 자신의 나이가 허무해지기도 할 것이다. 별달리 별식이라고 할 것은 없고. 일부러 가져온 고등어를 굽고 밑반찬 몇 개를 늘어놓으니 그런대로 먹을만한 상차림이 됐다. 진석은 얼음주머니를 내려놓고 수저를 들었다. 제일 먼저 젓가락이 닿는 곳은 아니나 다를까 고등어. 나는 물 한잔 떠놓고 그 앞에 앉아서 놈이 밥을 먹는 꼴을 지켜보았다. 볼을 잡아 당겼다고 해도 작정을 한 터라 입안이 터진 놈은 밥을 씹다 말고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나는 물컵을 밀어 놈의 앞에 놔둬주었다. 병 주고 약주고지. 들으라고 일부러 중얼거리면서 놈이 물을 마셨다. 살짝 뒤로 젖힌 고개 탓일까. 놈의 목에 박힌 멍자욱이 새삼 선명하게 눈에 비추인다. 다시 민망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나는 입을 뗐다. 내가 흥분을 해서 잠시 잊고 있었던 용건이 그제야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진석아." "왜?" 순순하게 응,이 아니라 되바라지게 말끝마다 왜?다. 그 성미에 언젠가 니 놈이 당하리라.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평온한 체를 해보였다. "너 요즘 수진이네 집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냐?" "왜. 또 문제 있대?" 놈이 건성으로 중얼거린다. 지 밑에 있는 애인데도 의무감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눈치다. 그 기집애가 저를 좋아하는 것을 뻔히 아는 주제에도 소 닭 보듯 하는 기미는 변하지가 않는 것이다. '곁을 주지 않는 차가운 사장님'이지만 실상은 '참 바보같이 착해서' '해끼치기 싫다'고 했던가. 그 고생을 하고도 아직도 세상이 장밋빛인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수진이 그 자식 사람 보는 눈이 그 모양으로 없으니 앞으로 어찌 살지가 걱정이었다. 하나 앞으로는 앞으로고 지금 중요한 것은 작금에 닥친 문제다. 나는 놈을 빤히 바라보면서 부러 한숨을 쉬어 보였다. "소름끼치게 왜 그래." 놈이 내가 하는 꼬락서니를 보더니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는 고운 말만 골라서 하는 놈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너 수진이가 빚지는 거 알고 있냐?" "뭐?" "너한테 말고, 사채 끌어다 쓰는 눈치던데. 오늘 길에서 맞고 있는 거 내가 주워왔다. 내 방에서 지금 이불 뒤집어쓰고서 자고 있어. 이자도 제대로 못 갚은 모양이야." 그제서야 일이 심각하다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놈의 입매가 설핏 굳어버렸다. 그는 밥숟가락을 내려놓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말없이 그런 놈을 가만히 봐주었다. "또 왜?" "뻔하잖아. 어머니 일이지." "-망할 노친네. 그냥 죽어 주는 게 딸내미 살리는 길이구만." 놈의 입맛이 쓴 듯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 어조에 담긴 서글픔을 내 모르는 바가 아니다. 천애고아나 다름없이 컸지만 우리 엄마가 거둔 덕에 이 놈은 어머니라는 이름에 약했다. 팔자는 세도 정은 많았던 여자라 자기 자식도 아니고 한때 잠깐 알았던 직장 동료의 아들인 놈을 자기 자식처럼 정붙이고 키운 게 우리 어머니였다. 지 어머니 대신 우리 어머니가 지 코를 닦아주었고, 지 어머니 대신 우리 어머니가 제 학비를 댔다. 아주 망나니로 굴었던 나와는 달리 녀석이 학교생활은 착실하게 하고 대학까지 붙었던 것은, 그런 우리 어머니에 대한 나름대로의 보답이었던 것이다.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일 섧게 울었던 것도 저 놈이었고, 아직도 어머니 기일을 나보다 먼저 챙기는 게 놈이기도 하다. "그래서. 얼마래?" 하지만 그렇게 서글프다고 하더라도 제 이익이 없으면 꿈쩍할 진석이가 아니다. 사연은 딱하지만 어쩌겠어? 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놈은 수진이가 무슨 착각을 하든지 간에 그녀를 데리고 있는 포주인 것이다. 수진이가 진석이네 가게 간판이 아니었다면 진석이는 수진이를 진작에 그만두게 했을 터였다. 오지랖 넓게 남의 인생까지 챙겨 줄 수는 없다는 것이 놈의 지론이었다. 천만 다행으로 수진이는 진석이네에서 No.1으로 있는 애고 돈 잘 쓰는 단골도 꽤 잡아서 가게 수입에도 보탬이 되는 편이다. 당장에 얘가 없으면 떨어질 사람이 몇 되기에 진석이는 군소리 안하고 수진이의 뒤처리를 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천 오백." "이자는?" "이자까지. 그런데 문제는 돈이 아니라, 돈 빌린 상대다 진석아." 입맛이 딱 떨어진 모양이다. 숟가락을 놓고 담배를 다시 입에 문 진석은 불쾌한 얼굴을 하고 담배 연기를 뿜었다. 내가 생각해도 제법 큰돈이다. 아무리 수완 좋다는 놈에게도 부담이 될 것 같은지라 놈에게 밥상머리에서 담배 꼬나무는 버릇없는 짓을 한다고 야단치지 않았다. "상대가 누군데?" "대연 금융." "…그 기집애가 진짜 신세를 조지려고 환장을 했나." 사채도 그냥 사채가 아니다. 대형 조직을 뒤에 끌어다 댄 데다가, 이자율이 높고 자금회수가 악착같기로 명성이 높은 곳이 바로 대연금융이다. 뒤도 배경도 없이, 그저 제 몸뚱아리 하나 믿고 사는 수진이 같은 년이 말려들었다가는 그나마 믿고 있던 몸뚱아리 걸레가 되도록 혹사당하고 섬으로 팔려갈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일반적인 금융권에서 집도 절도 없는데다가 대외적으로 안정된 직장도 없는 수진이가 대출을 받을 수 있을리 없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 일은 너무 생각 없이 벌인 일이었다.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손으로 문지르던 진석이 이를 바득 갈았다. 그쪽으로 가서 허리 굽히고 애 빼내와야 하는 게 성가시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앞으로 이런 일이 없게 만들어야 할게 아니냐. 니가 따끔하게 한마디해라. 급하다고 그런데 손 댔다간 그렇지 않아도 망가진 인생 완전히 버리게 돼. 내 말이라면 안 들어도 니 말이라면 듣겠지. 알아듣게 말해. 두 번 이런 일 하기 싫으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덧붙여 한가지 충고를 더했다. 대답 없이 앓는 소리를 하고 탁자에 머리를 박은 진석이 놈이 뭐라고 욕설을 중얼거린다. 저렇게 짜증을 내도 할 일은 할 놈이니까 어떻게든 하겠지. 이제야 내 할 일은 끝났다 싶으니 마음이 놓였다. …근데 그 힘 좋은 여자가 대체 뭔 짓을 했길래 저기에까지 쪼가리가 있는 거냐. 놈이 숙이고 있으니 가운 깃이 벌어져 놈의 뒷덜미로부터 등허리까지가 쭉 하니 보인다. 남자 등에다 대고 무슨 짓을 한 건지 놈의 어깨쭉지 쪽에도 뻘건 멍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여자가 남자 등뒤로 돌아갈 수 있는 체위 같은 게 있던가 하고 멀거니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이 안 가는데. 엎어놓고 물고 빨고 한 거 아니면 저런 데 저런 자욱이 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애를 어떻게 굴리면 저렇게 얼룩점박이가 되는 것일까.' 내가 상상 못하는 고난이도의 뭔가가 있는가 보다, 라고 나는 맘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리 진석이가 이뻐도 그렇지 사내놈을 엎어놓고 지 맘대로 갖고 놀다니. 그렇게 생각하고보니 그 여자가 엄청스레 존경스러워지기도 한다. 호스트를 찾는 정력 좋은 여자라 그런가. 얼마나 세게 깨물었던지 치열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놈의 멍은 꽤나 외설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나 간다." 애를 앞에 두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머릿속에 떠도는 것은 온통 얼굴도 알 수 없는 그 요상한 여자와 진석이의 정사장면뿐이다. 정확하게는, 가만히 엎드려 누운 진석이의 등뒤에서 깨물고 핥고 하고 있는 여자의 형상이지만. 장사하느라 오래 금욕을 해서인가. 동생 같은 녀석의 잠자리를 상상하고 있었던 자신의 변태스러운 짓거리를 되새겨보자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래서, 아직도 자기 혼자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놈을 내버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면서 툭하니 던진 말에 혼자 생각에 잠겼던 진석이 고개를 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표정이 심기가 적잖이 불편한 눈치였다. "왜 벌써 가?" "장도 봐야 하고 일도 시작 할 때라서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밥 먹고 한 숨 더 자라. 자는 거 두드려 깨워서 미안하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라고 중얼거리던 진석이 놈은 그제야 나를 배웅한다고 일어섰다. 손을 저어 그것을 만류한 나는 들어올 때와는 달리 홀가분한 맨 몸으로 놈의 아파트에서 벗어났다. 어쨌거나 일은 다 잘 됐으니, 강 건너 이쪽 동네까지 발걸음을 한 값은 충분히 한 듯 했다. 진석이가 그래도 아예 말종은 아니니까 어떻게든 해결을 하겠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수완을 제법 부리는 놈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오늘도 장사는 황이다. 음식 만드는 주제라 담배가 꼴려도 피지도 못하고 의자에 멍하니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음악에는 취미가 없어 라디오는 틀어봤자 정신만 사납다. 교도소에서 취미가 붙었던 게 독서지만, 오늘은 중간에 진석이네 집에 다녀와야 했기에 책을 안 들고 나왔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인가 뭔가 하는 황당무계하게 엉뚱한 소리 잘하는 작자의 소설이 읽을만 하다던데. 내일은 장보기 전에 잠깐 서점에나 들러봐야 되지 싶다. 평소대로라면 이렇게 심심해서 몸을 뒤틀 일은 없겠지만 일산판지 뭔지가 거리를 뒤 엎은 파장은 꽤나 지독해서 오늘은 정말 뜨내기조차도 드는 사람이 없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잡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하품을 했다. 심심하고 지루하다. 운동이라도 할까. 포장마차 안에서 주인이 혼자 맨손 체조하는 광경이 웃기기는 해도 - 사실, 웃기기보다는 처량하다 - 잠을 쫓는데는 그만한 방법이 없다. 나는 그래서 바닥에 엎드려 팔 굽혀 펴기를 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공간이 워낙에 협소한지라, 여기에서 할 만한 운동이라는 게 달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옛날에는 기합으로 지긋지긋하게 받았던지라 내가 내 스스로 이런 걸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사람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미래를 생각하면 누구도 단정을 못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함부로 남을 치죄해서는 안 된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하나, 둘, 셋 …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 둘." "어머. 에너자이저네." 그렇게 운동을 막 마음먹고 시작을 하고 있는데, 타이밍 나쁘게도 포장이 젖혀진다. 나는 혼자 뻘 짓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에 괜히 농담처럼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맘먹고 시작한 건데 손님이 와서 다섯 개 밖에 못했다. 젠장. 항상 이 모양이다 이 놈의 장사는. 나를 보면서 건전지 광고 따위를 떠올린 '손님'은 민희였다. 진석이 경영하는 바의 고정인. 공주님처럼 화려한 롤 헤어에 아슬아슬한 탑 원피스를 입은 민희는 수진이랑 달리 화려하고 요염하게 생겨 딱 봐도 이쪽 계통이구나 싶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는 나를 바라보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웬일이냐?" 나는 그런 그녀를 희한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시간대가 시간대인 만큼 그녀가 직접 여기에 나왔다는 것은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야참을 사러 보낸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직접 오기 보다는 밑에 있는 웨이터 애들을 보내는 것이 정석에 맞기 때문이었다. 민희라면 메뚜기처럼 이 손님 저 손님한테 옮겨 다녀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만발인 아이였다. 원래는 강남의 어느 룸에 있었다는데, 그런 그녀가 왜 이 동네에서 썩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안이 갑갑해서 바람 쐬러 나왔어요 오빠. 저 꼼장어 좀 주세요." "그거 먹고 남은 장사 어떻게 하려고?" "들어가면 칫솔이랑 다 있어요. 야참도 할 겸 바람도 쐴 겸 나왔으니까 기분 좀 풀게 두세요. 오늘 가게 분위기가 너무 음침해서 거기에 있기는 싫거든. 손님도 별루 없구." 그녀가 어린애처럼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릴린 먼로를 흉내내는 게 노골적인, 천진스러워 보이는 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나름대로의 비장의 카드고 교태라 나는 그녀가 그런 흉내를 내는 것이 참 즐거웠다. 그녀는 부챗살 같이 화려하게 펼쳐진 눈썹을 가늘게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탄불에 꼼장어를 구우면서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했다. 탁자 위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괸채 내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민희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문제야 많죠. 가게 간판이라고 하는 애는 얼굴도 못 알아보게 퉁퉁 부어서 뒷방에서 질질 울고만 있지. 사장님은 그 고운 얼굴에 흉져서는 카운터에도 못 나와 있지. 무슨 일이 있긴 있지 싶은데, 아무도 이야길 안 하니까 겁이 더럭 난다구요. 우리 사장님 수완 좋아서 이제껏 큰 일은 없었는데 왜 그러나 모르겠어요. 일산판가 하는 것들이 지독하게 구나 싶기도 하고."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시기가 시기이니 만큼, 불길한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내심 뜨끔했다. 녀석의 양쪽 뺨에 엄지손가락 모양의 우습게 생긴 멍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나였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를 가지고 흉지니 뭐니 하는 것은 좀 오버였지만, 확실히 그 얼굴을 하고 손님 앞에 나설 수 없을 거라는 것은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예술적인 얼굴에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있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깡패 새끼들이라서 보는 눈도 없는 건가. 어떻게 우리 사장님 같은 얼굴에 손을 다 대요!!! 진짜 무식해!!!!"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민희는 하필이면 내가 찔리는 부분을 골라 느닷없이 열을 냈다. 그녀가 화를 내는 부분은 공감하기 힘들었지만, 장사밑천 망친 죄는 통감하고 있으므로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비이락격인 우연 때문에 그녀가 일산파 쪽으로 오해하고 겁을 내고 있는 눈치라서, 그것만이라도 풀어주고 싶어서였다. 가게가 압박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면 애들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 부평초 같은 애들이니 조금의 위험에도 금방 금방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지는 것이다. 진석이한테 마음이 있는 애들이야 쉽게 안 움직이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애들의 마음에 불필요한 불안감을 심어줄 필요는 또한 없었다. 진석의 얼굴에 손을 댄 것은 전혀 죄스럽지 않았지만, 내가 한 일 때문에 녀석이 간신히 일궈놓은 사업장이 문을 닫는 것은 바라지 않는 바였다. "내가 그랬어." "…네?" "진석이 얼굴. 내가 그랬다고." 나는 가능한 한 태연한 얼굴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나를 향해 진석의 얼굴에 손을 댄 누군가에게 열렬히 저주를 퍼붓고 있던 민희는 황당한 표정을 하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고양이 같은 눈매가 점점 사납게 돌변한다. 나는 그녀가 상상 이상으로 무섭게 돌변하자 좀 당황스러워졌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입안이야 터졌든 어쨌든 놈의 뺨에 생긴 건 엄지손가락 모양의 앙증맞은 멍이었다. 그걸 가지고 얼굴이 망가졌니 손을 댔니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오버가 아닌가 말이다. "진짜 오빠가 그랬어요?" "그래." "왜요. 싸울 일이라도 있었어요?" "그럼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걔를 팼겠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그녀는 어지간히도 화가 나는 눈치였지만, 제가 진석이와 나 사이에 일에 화를 낼 수 있을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 입은 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제 앞에 내주는 꼼장어와 오뎅 국물을 바라보다가 화풀이라도 하듯 꼼장어를 우걱 우걱 씹어 먹기 시작했다. 좋겠구나 연진석. 그런 밤톨만한 상처에 이리도 분노해주는 아가씨가 있고. 나는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그녀가 하는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꼼장어를 혼자 씹어 먹으면서 누굴 들으라는 듯이 팽하니 중얼거렸다. "아니, 그 곰이라도 잡을 것 같은 팔뚝으로 누굴 괴롭혔다는 거야. 산도둑놈처럼 생겨서는 우리 사장님 같이 약한 사람을 때리고 싶었을까." 아이구. 아가야. 언제는 진정한 남자의 향기가 나는 터프한 매력이 있다더니? 거칠거칠한 남자의 매력이라 좋다며?? 얼마 전. 가게를 작파하고 단체로 놀러온 여자애들이 재잘거리면서 해줬던 찬송을 상기하며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진석이의 '형님'이라서인지 나에게 유달리도 곰살맞게 구는 진석이네 가게의 아이들은 그날 나를 완전히 들었다가 놨었다. 오빠는 진짜 남자답게 잘생겼어요. 포장마차 주인하기 너무 아깝다. 오빠는 왜 영화계로 안나갔어요? 액션배우 같은 거 하면 진짜 멋있었을텐데! 키도 크고 몸매도 끝장이고. 게다가 눈매가 너무 섹시하잖아. 꺄악 꺄악 꺄악. 술 취한 여자애들의 말이라 털끝만큼도 안 믿었지만, 바로 본심이 나올 헛소리는 대체 왜 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뭐라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그냥 웃고 말았더니 민희는 저를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얼굴이 한층 더 뾰로통해 지고 말았다. "어서오세요." 다행히도, 그 불편한 자리를 해소해 줄만한 사람이 중간에 들어왔다. 잘못하면 녀석을 달래야 할지도 모르는 불길한 사태 앞에서 사실은 조금 난감해하고 있던 나는 얼씨구나 잘됐다 싶은 심정이 되었다. 몇 년만에 하는 진심 어린 인사가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손님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해사한 몸집에 어딘지 모르게 근질거리는 입매를 가진 사내. 나른하고 건조해 보이는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친다. 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이틀 전에, 그러니까 이 거리의 주인 이름이 상구파에서 일산파로 바뀌었을 운명의 그 날에 여기서 밥을 먹고 갔던 남자인 것이다. 그동안 손님이 어느 정도로 없었는지 알만 하다. 나는 뜨내기손님의 얼굴까지 기억하고 있는 스스로의 기억력에 찬탄하기보다는 그동안의 처참한 장사 기록이 먼저 떠올라 우울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손님은 내 앞자리에 앉아서 소주 한 병과 닭발을 시켰다. 원수라도 되는 듯 꼼장어를 우걱 우걱 처먹고 있던 민희는 기어코 한 접시 낸 걸 다 먹어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잘 먹었습니다아~" 저 '다아~'에 빈정거림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내가 아니다. 기가 막혀서 놈이 하는 꼬락서니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자니 녀석은 자리에서 휑하니 일어나 포장을 걷었다.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녀석을 불러 세웠다. "돈은?" 내가 설마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나 보다. 돌아보는 눈이 황당스럽게 보인다. 나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놀란 기색을 보였던 것이 분한 것일까. 계집애가 앙칼진 목소리를 하고 입을 열었다. "그어요." "못해." "왜요?" 기집애가 발끈한다. 평소라면 나중에 갚겠거니 하고 그냥 두는 내가 오늘따라 딴지를 거니 심통이 나는 모양이었다. 지가 나한테 건 딴지는 생각지도 않고 바락바락 하는 기집애가 웃겨서 나는 빙그레 웃었다. 웃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이 없다면 외상 받아주겠지만, 있는데도 안내는 염치없는 손님한텐 외상 안 줘. 돈 내놔." "정말 오늘따라-. 아 됐어요. 쫀쫀한 양반 같으니라고." 색색거리면서 거친 숨소리를 내던 민희는, 내 눈에서 한치의 양보도 읽어내지 못하지 팩 거리면서 만원짜리 한 장을 던졌다. 나는 앵돌아져 가버리는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에게 전혀 상관하지 않고 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흥미로운 듯, 앞에 놓은 닭발은 건드리는 시늉도 안 하면서 손님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지간히도 재미있겠지. 사람이 제일 좋아 하는 게 싸움구경이랑 불구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아무 소리도 앉고 다시 카운터 뒤로 돌아갔다. "정말 성질 많이 죽었군." 그렇게 몸을 돌리는데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저거 아무리 봐도 나한테 하는 말 같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봤다고 내 성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안단 말인가. 겨우 초면만 넘긴 사이에, 나의 무엇을 안다고. "무슨 소립니까." 나는 카운터 뒤에 서면서 조용히 물었다. 생긴 걸로 봐서는 틀림없이 호스트나 그 근처의 부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하는 폼새가 영 심상치가 않았던 것이다. 혹여나 형사라거나, 하다못해 대정의 끄나풀이라던가…? 이제는 그런 일이 적지만 막 출소한 직후에는 그 두 부류의 인간들이 나를 꽤 성가시게 했던 적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고, 또한 자기들끼리 견제를 하고 있었던 덕에 무사히 빠져 나올 수가 있었지만 그런 놈들에게 몇 년간이나 시달렸던 것은 꽤 큰 후유증으로 남았다. 순간적으로 드는 의심이지만, 상대가 내 험상궂은 얼굴을 그대로 마주보면서도 표정조차 달라지지 않는 점이 그런 의심을 더욱 부추겼다. 위협하느라 일부러 거친 티를 내는데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다니. 아무래도 이 남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영락한 호스트 따위는 아닌 듯 싶었다. "아니. 몸집이나 인상을 보아하니 한때 한가락했던 사람인 것 같아서 해본 말이지. 다른 뜻은 없어." 나만한 덩치의 남자가 험악하게 노려보고 있는 게 그래도 걸리기는 하는 모양이다. 한참을 내 눈을 바라보면서 말이 없던 남자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는 남자가 말을 더 하기를 기다렸지만, 남자는 그것까지만 하고는 다시 소주잔을 기울이는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왕년에 금송아지 없던 집이 있습디까."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어느모로 보나 애매한 어투였지만 저런 정체도 모를 사내에게 진지하게 대답할 필요성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남자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놈은 자신이 말한 의도만 갖고 있을 뿐인 걸까? 예리하게 상대를 분석해봤지만 도통 표정이 없는 사내에게는 얻어낼 것이 없었다. …하긴. 기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이제와 내가 뭘 할 것도 아니고, 이제와 그런 쪽에서 날 찾는다고 해도 나는 정말로 해줄 말이 하나 없다. 진석이 놈보다도 바깥 돌아가는 사정이 어두울 정도니 나에게 와서 물어봤자 뱉어낼 만한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내가 결백하면 됐지 뭘. 그렇게 생각한 나는 지레 겁을 먹는 것도 웃기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비웃었다. 남자가 다시 눈을 들어 나를 보는 것 같다. 그 눈을 맞춰가며 심기를 낭비하느니,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는 손님들 생각해서 꽁치라도 다듬는 게 낫다. 나는 일부러 남자의 시선을 무시하고 딴 짓에 열중했다. 잠시 내게 머물렀던 시선이 사라진다. 저번처럼 말없이 술 한 잔에 닭발 하나씩을 집어먹는 손님은 말이 유달리 없을 뿐 일반적인 뜨내기들과 별 다를 바가 없는 존재였다. …그나저나. 나는 생각했다. 이제와 보니 저 남자는 도무지 호스트 따위를 할 놈이 아니다. 내 시선을 범상치 않게 받아넘긴 것도 그랬고, 존재감 같은 것도 그런 사람들에 비해 유독 특별나다. 게다가 한번 지나가는 뜨내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이 남자를 두 번이나 보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번이 끝이 아니라 더 자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가슴속에 스몄다. 나는 남자에 대해서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남자가 처음 나타났던 날이 언제였는지를 깨닫고는 순간적으로 무릎을 치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아아. 맞다. 내가 왜 그것을 잊고 있었을까. 이 남자가 처음 왔던 것은 분명히 일산판가 뭔가 하는 놈들이 이 구역을 점령하던 그 날 밤이었다. 그날 밤. 포장을 걷기 직전에 막바지에야 와서, 무엇인가에 긁힌 듯한 자국을 뺨에 남긴 채 혼자 우울하게 술을 먹던 남자. '일산이군.' 예감은 확신으로 다가온다. 나는 남자의 이름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일산인지 박일산인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눈앞의 남자는 근래에 이 근처를 숨통 막히게 조이고 있는 일산파의 두목이다. 똘마니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막 나와바리 정리가 끝난 시점에서 똘마니 따위가 한가하게 술잔을 기울일 시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고, 간부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이제 막 시작된 신흥 조직에서 이 정도의 인물을 간부로 둘 여력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쉽게 움직이지 않고 쉽게 말하지 않는. 겉보기로는 그저 얄생한 호스트 같이 생긴 남자지만 하는 행동이 꽤나 엄정한 것이다. 자기 힘을 믿고 거들먹거리는 아래 어깨들이나, 한참 독이 올랐을 중간 간부들에게 이런 식의 행동방식을 찾아보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러니 남은 사람은 그 중소조직의 보스 밖에 없는 것이다. '네가 범인이다!' 그런 생각에 몰두하다보니, 손가락으로 놈을 가리키고 부르짖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심심하다고 빌려봤던 만화의 영향이 너무 큰 모양이다. 서른권이 넘어가는 걸 심취해 모조리 읽어 내렸으니 이런 기분이 들만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김전일인지 뭔지 하는 주인공 놈이 하던 것처럼 네 놈의 정체를 밝혀 주지라는 말과 함께 손가락질로 그를 지목하고 싶은 당치 않은 마음까지 드는 것은, …역시 내가 너무 심심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가장 완벽한 아침 06 "야. 일어나. 상 내려놓게." 정신을 잃은 지경으로 깊게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발길질로 허리를 툭 치면서 나를 깨운다. 나는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떠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상을 들고 와서 내 허리를 밟고 있는 놈은 난데없이 태규 놈이다. 분명히 오늘 아침 내가 집으로 들어올 때만해도 없었는데. 내가 멍하니 놈을 올려다보고 있으니까, 놈이 답답한 듯 다시 한번 내 허리를 발로 걷어찼다. 놈에게는 살짝이지만, 맞는 쪽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타격감을 실은 채 말이다. "일어나. 해가 중천이야. 밥 먹을 거니까 비켜."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이 놈에게 스페어 키를 쥐어 줬었지. 나는 그제서야 제법 정신이 돌아와, 놈이 우리집에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놈은 오늘도 밤을 샌 모양이었다. 놈의 집은 경기도 성남 쪽이라서 밤을 새고 오후에 출근할 일이 생기면 근처 여관이라도 가던가 하다못해 내 집에라도 기어와야 몇 시간이라도 제대로 잘 수 있다. 한 몇 달은 그런 일이 없어 까먹고 있었지만, 놈이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나를 습격하는 일이 이전에도 종종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은 그런 사정이고. 나는 입이 댓발은 나오게 투덜거렸다. 이 놈의 새끼가 지네 집인가. 누구 스케쥴에 맞춰야 하는 거냐. "밥 안 먹을래?" "…일어난다." 그러나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내가 일어난 것은 이불을 개지 않으면 상을 놓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순순히 일어나서 이불을 한쪽 귀퉁이로 몰았다. 두꺼운 겨울 이불이라 자리를 차지하는 면적도 마는지라 나름대로 구겨서 넣어 둔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자리가 넉넉지 못하다. 열 평이나 간신히 됨직한 방에 세간살이를 다 들여다 놓은 데다, 180이 넘어가는 장정까지 둘이나 있으니 그럴 만도 한 것이다. 태규는 180이고 나는 183이다. 고등학교 때를 마지막으로 키 재 본적이 없지만 허리가 꼬부라지지도 않는 이 나이에 키가 줄 리는 없을 것 같다. "…언제 왔냐?" 나는 내 앞에 차려진 상을 보면서 물었다. 뽀얀 윤기가 찰찰 흐르는 쌀밥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가 식욕을 자극한다. 필요성이 아니라 절박성에 가깝게 생활능력이 필요한 진석이 놈은 라면 물도 못 맞추지만, 그래도 뒷바라지 해주시는 어머니가 아직 계시는 태규 놈은 제법 손재주가 있어 설렁설렁이라도 필요한 일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놈은 내 앞으로 주저앉으면서 무표정한 인상으로 말했다. "열시쯤에." 우리 중에 유일하게 화이트 칼라라는 직업이지만, 알고 보면 저 새끼도 참 불쌍하게 밥 빌어먹고 사는 인종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기라도 한다. 저 놈은 눈 시뻘개서 종종거리면서 돌아다니다가 내 집 현관에서 그대로 뻗은 채 코를 고는 일도 심심찮게 있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놈의 대답에 어라, 싶은 기분이 들어 시계를 봤더니 오후 2시가 조금 넘었다. 꼴랑 네시간도 안 잔 놈 치고는 지나치게 팔팔하다. 나는 잠에서 덜 깨 꺼끌한 목소리로 놈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럼 좀 더 자지 왜 벌써 설치고 난리냐." "원래 잠을 제대로 못 자는 직업이라. 한번 눈 붙이면 숙면이야." 그러니까 그 세시간 남짓 자고서 정신이 들었다는 듯 하다. 완전히 길들여졌구만. 처량한 인생 같으니라고. "그래도 새끼. 내 스케쥴을 생각해줘라. 나는 보통 오후 세시까지 잔다. 알았냐?" "밥 처먹으라고 깨워놨더니 말이 많네. 먹기나 해." 내가 잠을 못 이룬 원한에 으르렁거렸더니 놈이 사납게 내 말을 일축한다. 확 걷어 차 버릴까 하다가, 이 놈이 이렇게 메마르고 삭막한게 하루 이틀 일이었나 싶어 입 다물고 물만 마셨다. 찬물이 위 속으로 기어 들어가니 그나마 좀 정신이 맑아진다. 숟가락을 들면서, 나는 리모컨을 꺼내 텔레비전을 틀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텔레비전을 볼만한 시간도 없다. 요즘은 텔레비전이 미쳤는지 공중파도 거의 하루 종일 방송을 한다. 내가 국민학교 때는 다섯시 반에 시작하는 만화를 기다리느라 목이 빠졌는데, 요즘 애들은 팔자가 늘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랑 하나 해주는 것이 고작이던 어린이 프로도 겹겹이 몇 개씩이나 계속해줄 정도고. 게다가 요즘은 유선이니 케이블이니 하는 게 있어서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하고 또 한단다. 이 동네에서 유선을 안단 것은 총각네 뿐이우. 전기세 내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주인 아주머니께 신기하다는 듯한 어조로 그런 말까지 들을 정도였으니 과연 24시간 방송을 하는 시대인가 보았다. 그런 시대에 혜택을 못 받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내가 유일할 것이다. 하도 오랜만이라서 리모콘조차도 손에 설었다. "텔레비전이나 보자." "…………." 말하다가 죽은 귀신이 붙었지. 어째 의미심장하게 과묵한 태규 놈을 앞에 두고 나는 리모콘을 내려놓았다. 이 시간대에는 아침 다큐멘타리가 많다. 아줌마들 보는 프로들을 피해가면서 리모콘을 돌렸더니, 마침 뉴스를 시작하는 곳이 나온다. 잘됐다 싶어 리모콘을 내려놓고 숟가락을 들었다. 시그널이 흐르던 화면이 바뀌고 빨간 정장을 입은 여자 아나운서가 브라운관에 떴다. 뉴스 속보입니다. 깔끔하게 생긴 여자 아나운서가 카메라를 무섭게 째려보며 중얼거렸다. [백동영씨 자살 사건에 대한 속보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방금 검찰에서는 피넬호텔 카지노 로비 의혹과 관련해 수사해오고 있던 백동영씨의 사망에 대해서 최종적으로 수사를 종결하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다음은 이진경 기자를 연결해 자세한 소식을 듣겠습니다.] 태규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굳었다. 나는, 내 귀에 들어온 이름을 의심하면서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누군가가 농담이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겠지. 내가 이름을 잘못 들은 거겠지. …동명이인이겠지. 손바닥에 흠뻑 닿는 땀을 닦으면서 나는 괴롭게 숨을 삼켰다. [검찰은 오늘 정오. 백동영씨 자살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피넬 호텔 카지노 로비 의혹과 관련해 수사해오고 있던 백동영씨의 사망은 타살이 아닌 자살이며, 가족들 앞으로 남긴 유서 또한 친필로 확인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국과수에 부검을 의뢰한 결과 타살로 인해 사망한 혐의가 전혀 없다는 것이 검찰 측의 발표입니다. 한편 야당 쪽에서는 백동영씨의 사망에서 겨우 이틀이 지난 시점에서 공식적인 수사를 마무리하는 것은 여당 쪽의 축소 수사 압력으로 인한 것이라며 -] 나는 숟가락을 떨어트릴 뻔했다. 무심히 보려고 무심히 틀어놓은 텔레비전 속에는 내가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는 인물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난데없이 맞는 벼락이랑 마찬가지라 가슴이 철렁하다. 눈을 돌리려고 해도 돌릴 수가 없다. 내 눈동자는 오십대지만 제법 호남형으로 생겨먹은 백동영의 사진에서 떨어질 줄을 몰라 했던 것이다. 저 빌어먹을 얼굴을 어떻게 잊을 것인가. 나는 등뒤로 달리는 한기를 느끼며 생각했다. 백동영. 백동영이라. 저 남자는 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수 없을 정도의 원수였다. 저 자는 내 어머니를 죽인 거나 다름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교도소에는 절대로 못 보낸다고 생각했던 우리 어머니가 선처를 바라며, 전셋집을 팔아 간신히 마련한 전 재산을 들고 미련스럽게도 대정을 찾아갔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합의를 해야 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몰매만 맞고 쫓겨났다. 내가 옥에서 몇 년 살다가 돌아올 때까지 간신히 숨은 붙어 있었지만, 그때 든 골병은 결국 어머니의 고된 삶을 짧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부러진 후, 제대로 치료를 못해 내려앉은 코뼈를 하고 한때는 제법 곱다는 소리를 들었던 어머니는 남은 인생을 살아야 했었다. 뼈 마디 마디에 서린 장독을 채 풀지도 못하고 옥바라지를 하시는 바람에, 골수에 든 병은 더욱 깊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밤마다 끙끙거리고 앓는 소리를 내는 어머니의 머리맡에서, 밤중에 깨어 혼자 찬물을 마시며 끓어오르는 속을 달랬던 밤들을 기억했다. 벼락 맞아 죽어도 상관없을 아들 새끼가 혹여나 들을까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주무시는 걸 발견하고는, 괜히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성질을 냈던 것도 또한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원한은 단지 이쪽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쪽 또한 나를 응징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나와 나의 친구들은 감히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지체불구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거만한 남자에게 참을 수가 없는 모욕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백승지는 대정의 백동영. 대정의 보스인 백동성의 동생이자 명실상부한 대정의 2인자 였던 남자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이었다. 단지 아들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위신에 손상을 입은 것이라고 생각한 백동영은 마치 선불 맞은 멧돼지 같은 기세로 분노했다. 다른 조직과의 전면전도 아니고, 겨우 젊은 사내 몇을 잡겠다고 푼 인원은 자그마치 백여명을 넘어섰던 것은 그가 스스로의 자존심에 입은 타격을 그만큼이나 존귀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느 조직의 일원이라도 꿈쩍을 못할 터에 하물며 나와 내 친구들은 그저 동네를 돌아다니며 건들거리던 건달이었을 뿐이었다. 감방에 가기 전에 병신이 된 새끼도 있었고, 옥안에서 칼을 맞았던 놈도 있었다. 애초에 다섯 놈이서 벌인 일이었지만 그 지옥을 멀쩡하게 치르고 나온 것은 여자애의 오라비였던 시건과 내가 유일했다. 제법 공부도 하던 시건이 새끼가 마음에 독을 품고 조직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또한 그래서였다. 오로지 자기 때문에 병신 되고 인생을 망친 다른 놈들의 빚을 갚기 위해서 놈은 지 인생을 그대로 저당 잡혀 복수를 사려고 마음먹었다. 병신 삽질 말라고, 우리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놈에게는 '그 일'에 우리를 끌어들인 책임감이 있었던 것이다. 놈은 자신이 우리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나라고 해서, 복수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건이가 복수는 혼자 하겠다고 나섰더라도, 놈을 따라나설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참고 죽은 듯이 살아온 것은 나 때문에 골병든 우리 어머니가 유언으로 그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아래로 하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할 지경이 되어도 병원도 가보지 못한 주제에, 내가 네 놈이 주먹으로 밥 먹고사는 꼴을 보면 하늘에서도 속이 타서 죽을 것이라 눈물을 줄줄 흘리며 사정을 했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세상에 남기는 것은 나 하나뿐이라고 했다. 그 여자가 오로지 바라는 것은 자기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자식새끼가 행복하게 사는 꼬락서니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어미의 청을 나는 거역할 수가 없었다. "…시건이냐." 순간적으로나마 짚이는 데가 있다. 나는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태규는 밥을 뜨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한테 그걸 왜 물어. 시건이랑 친한 건 너잖아." 천명(天命)이라는 당치도 않는 이름의 파 - 복수를 하는 것이 하늘이 제게 내려준 명이라는 뜻으로 지었다는 듯 했다. - 를 이끌고 있는 시건이는 중소 조직 중에서는 제법 자리를 잡은 축에 든다. 그쪽으로 담쌓고 있는 나와, 내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 이유를 알기 때문에 시건이는 그런 처지가 된 후 나를 잘 찾지 않았다. 얼굴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몇 개월에 한번씩이 겨우인 지경이라, 아무래도 그쪽이 일인 태규 쪽이 시건이와 연락이 더 잘 되는 편이다. 내가 시건이의 일을 태규에게 물은 것은 그런 연유가 있는 까닭이었다. "그 새끼가 한 짓이냐?" 나는 물었다. 놈이 정말로 성공을 했는지. 아니. 놈이 정말로 저렇게 제 죽을 무덤을 팠는지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백동영은 비록 후계자 싸움에서 밀려 예전의 성세는 잃었을 지언정 여전히 대정의 간부였고, 더군다나 대정의 주인집안이라고 할 수 있는 백씨 가문의 일원이었다. 대정의 현대(現代)로 백승언이라는, 내가 조져놓은 백승지 놈의 사촌 형 뻘 되는 인물이 일인자에 앉으면서 제 아버지가 남겨놓은 잔가지를 다 쳐냈지만 개중에서도 굵은 가지인 백동영을 처리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데에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백승언에게 백동영이 눈에 가시라고 할지라도 둘이 한 집안 식구라는 것은 변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망가진 아들을 남 보기가 부끄럽다고 정신병원에 가둬놓은 주제에, 그 아들의 복수에는 위신상의 문제와 결부시켜 철저하게 해치웠던 백동영처럼. 그가 외부인에게 당한다면 백승언 또한 위신 때문에라도 나서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건에게는 아직 대정을 당해 낼만한 힘이 없었다. 상대는 나라안에서 손가락으로 꼽히는 전국구였고, 시건이는 이제 겨우 서울시내의 몇 몇 지역을 쥐고 있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호랑이 앞에 여우. 그 정도의 전력차이가 나는데, 시건이가 감히 일을 벌였다면 사태는 심각해지고 말았다. "아니다. 다행히도." "그 놈이 아니면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거야!!" "시건이가 아니야. 백승언이다." 나는 놈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열이 치받아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태규는 여전히 태연했다. 태연할 뿐만 아니라, 아주 쓰디쓰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폼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뭔가 알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그 놈의 금쪽 같은 입을 도무지 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놈을 씹어 먹을 듯이 노려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오늘은 네 장단에 맞춰줄 여유가 없다. 이번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 그딴 식으로 구는 거냐. 나는 눈에 독기를 품기 시작했다. 시건이 이 빌어먹을 놈의 새끼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내가 알아야 한다고 하지 않아! 그 놈이 십 년 전과 똑같은 꼴을 당해 죽어 나가는 것을 내가 봐야 한다고 말하는 거냐 네 놈은!!!! "사실대로 이야기 해. 아는 거 다 말해봐. 어찌된 영문이야. 네가 오늘 내 집에 온 게, 정말 우연한 타이밍은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이런 일을 몰랐을 리가 없잖아." "우제열." "말해봐 선우태규." 말 안 하면 죽인다. 내 어머니에게 한 맹세를 깨고서라도. 그 기세를 알아챈 것일까. 태규는 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네가 흥분할 일 아니야. 정말로, 시건이 짓은 아니다. 시건이 새끼 지금쯤 넋이 나갔을걸. 지 평생 망쳐가면서 일을 벌이려고 했는데 목표가 이렇게나 허망하게 사라졌으니 말이야. …정말로 백승언이야. 백동영이 다시 대권에 도전하려고 폼을 잡았던 모양이더라. 제 숙부라도 두 번은 안 봐주는지 그 세력을 거진 도륙을 내고 자기 사람 채워 넣었거든. 손 발 다 잘리고, 묵혀 놓았던 비리 다 터지고, …처자식은 봐주는 댓가로 자살한 모양이더군. 단지 상구파만이 아니고 서울 시내에서 구역 갈린 게 한두 군데가 아니야. 백동영이 손길 닿는 데는 모조리 쓸려나갔어." "…상구파?" 나는 중얼거렸다. 상구파가 백동영의 손이 닿았나? 대정 계열과 구역 경계를 맞대고 있어도 별 충돌이 없어 임상구가 처신을 잘하는 모양이라고만 여겼었는데……. 나는 내가 이제껏 적진에 들어앉아서 장사를 해먹었다는 것을 이제야 안 까닭에 기가 막히기 시작했다. 태규는 씁쓸한 얼굴을 하고는 식어가고 있는 김치찌개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리고 아마 시건이도. 상구파가 그쪽 계열이라는 것을 이번에야 알았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네가 그 자리에서 장사하게 놔두지 않았지. 아무리 진석이가 네 뒷배를 봐준다고는 하지만 그냥 대정 계열도 아니고 백동영 쪽인데, 그놈도 나도 너에게 말을 하지 않았을 까닭이 있겠냐. 백승언이 작정이라도 한 모양인지 비밀리에 선이 닿던 데까지 완전히 물갈이를 했거든. 이번에 갈리는 걸보고 그쪽 계열이었구나 라고 검찰이 알아차린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지. 상구파도 그런 쪽이었다." "그럼 이번에 갈렸다는, 그 일산인가 뭔가 하는 놈들은 백승언 계열이냐?" "그럴 가능성이 커." "…하." 아무리 그쪽에서 흐르는 말에 귀를 닫고 살았다고 해도 그런 것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나도 태규도 몰랐을 뿐더러, 그쪽에 푹 절은 시건이 새끼까지 몰랐다니. 새삼 백동영의 용의주도함에 가슴이 섬뜩해져 왔다. 허나 더 두려운 것은 그런 백동영을 뿌리서부터 찍어냈다는 대정의 현 회장 백승언이었다. 백승지의 사촌형. 띨띨하고 추잡하던 백승지에 비하자면 닭과 봉이라는 평을 듣는다는 대정 전대 회장 백동성의 아들이 그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또래일 그 젊은 놈이 그렇게 무섭도록 용의주도하고, 또한 대담할 줄은 미처 예상도 하지 못했었다. "너 그럼, 이틀 전에 온 것 그거 알고서냐?" 나는 그러다 문득, 놈이 바로 며칠 전. 그러니까 상구가 일산으로 갈린 바로 다음날 내게 왔었던 것을 떠올리면서 중얼거렸다. 태규는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무슨 일인지 나도 몰랐었다. 그때까지는 아직 백동영도 살아 있었고, 물밑에 있던 조짐이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았지. 백동영이 자살한 것은 그날 새벽이다. 내가 알게 된 것은 그날 아침에서고. …백동영이 검찰조사 받는다는 거 듣고 네가 어떻게 하고 있나 보러 간 것뿐이야. 니가 그것도 모르는 눈치 길래 말 안 하고 온 거고." …그러고 보니 그때, 놈은 말했었다. '안 들리는 모양이니 됐다'고. 또 그런 말도 했었다. '청에서 밤새야 한다' 무심하게만 넘겼었지만 속사정은 이렇게 따로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충 태규 놈이 어떤 이유로 내게 왔었는지 감이 잡히기 시작한다. 한참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세상사에 관심을 잊은 사이에, 세상은 그 모양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 진짜 요지경 속이다. 나는 기가 막혀서 중얼거렸다. 백동영이 제 집안인 대정에게 그 꼴을 당하고 무너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 잘나신 백동영이, 제 손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야 하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밥맛이 뚝 떨어진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몸을 뒤로 물리고 말았다. 복수 따위에 집착하지 않으려던 나야 상관이 없지만, 그 놈 하나 보고 평생을 이 갈리는 진창에서 썩은 시건이 새끼는 지금 피눈물을 쏟고 싶을 정도로 허망할 것 같았다. 다리 저는 여동생. 팔뚝이 뭉개진 친구. 모조리 전과자라 제대로 된 직장도 잡지 못하고 노점을 하는 친구 새끼들을 보며 이를 악 물었던 시건이 새끼는, 우리가 잊으려고 노력했던 혈채를 혼자 짊어졌던 인물이었다. 그 빌어먹을 새끼. 남의 말 안 듣더니 꼴좋다. 나는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은 기분으로 생각했다. 그런 쓸데없는 일에 인생을 건 놈이 불쌍하고, 목표를 잃어버린 이후의 미래가 처량하다. 병신 같은 놈. 그러게 잊으라고 했는데. 어차피 되돌이표처럼 무한히 피가 피로 얽히는 관계라면 차라리 눈을 감고 모르는 척 하며 니 인생을 살라고 이야기했었는데. 남의 진지한 이야기를 농담처럼 듣고 웃던 그 망할 새끼가 얼마나 기가 찰까 생각하니 내 속이 끊어질 듯 아팠다. "나도 줘." 내가 숟가락을 놓고 보니 태규 놈도 숟가락을 놓고 있었다. 당사자는 아니지만, 옆에서 그 꼬라지들을 고스란히 지켜봤던 놈인지라 놈의 속도 역시 쓰린 모양이었다. 담답한 마음에 담배를 입에 무니 놈도 손을 벌렸다. 밥을 채 반도 안 먹은 밥상을 앞에 두고 놈과 나는 우중충하게 담배를 나눠 피었다. 좁은 방안에 매캐하게 들어앉은 담배 연기가 눈시울을 자극했다. 어린아이도 아니면서 엉엉 소리내어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한때 무서운 것도 모르고 설치던 세상이, 이제는 너무나 크고 거대하게만 느껴진다. 백동영이 저렇게 무너지는 데에 대해서, 나 자신이 아무것도 일조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한심스럽고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스스로가 너무나 무력하게 느껴졌다. 평생을 바쳐도 복수 할 수 없었던 상대를, 너무나 태연하게 해치웠다는 백승언 그 남자 때문에. 시건이 새끼의 인생 전체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도 대적할 수 없었던 상대를 우리 나이 또래의 그 남자는 자기 손안의 공깃돌처럼 굴려서 부셔버렸다.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그 얼마나 - 기가 막힌가. 우리보다 많아봐야 한 두 살이 많을 것이다. 또한 적어봐야 한 두 살이다. 우리보다 두 살이 어렸던 백승지를 생각하면, 정확히 나이는 알지 못하지만 백승언 또한 또래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놈이 가지고 있는 힘은 그러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힘에 비하면 너무나 거대했다. 결국 백동영을 죽인 것은 백승언이지 우리가 아니었다. 시건이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이 사람의 피를 태웠다. 나는 시건이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큰 치욕감에 떨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나마저도 이렇게나 아픈데, 그 놈은 대체 어느 정도나 고통스러울까. 그렇게 미친 듯이 발버둥치며 살았는데 결국 손안에 남은 것이 이거라니. 복수의 쾌감은커녕, 이런 지독한 좌절감이라니. -시건이 놈은, 우리는. 결국 패배자로 남고 말았다. 나는 인생이란게 이토록이나 쓰고 더러운 거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 --;; 어쩌면 이리도 시기가 공교로운지;;;;; 밥 먹으면서 뉴스 보다가 하마터면 심장마비 걸릴 뻔 했습니다. 우연이에요!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 이제는 지긋 지긋할 정도로;; ㅜㅜ 하지만 저는 소설 시작할 때부터 이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다구요. 써 놓은 건 일이 일어나기 전인데...... 이 뒤의 이야기를 다 버릴까 이 부분을 고칠까 하다가...큰 맘 먹고 올립니다. 고인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부분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이 빌어먹을 타이밍이란;) 가장 완벽한 아침 07 장사는 오늘도 안됐다. 대충 눈치라도 있는 것들이라면 지금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을 터였다. 태규처럼 자세한 사정이야 알지 못하겠지만 형태야 짐작을 할 게 아니겠는가. 나쁜 소문은 늘 가을녁 들에 놓은 불길처럼 빠르고 무섭게 퍼져나가게 마련이다. 하필이면 우리 동네냐고 한탄을 했을지언정 그걸 대 놓고 말할 용기가 없는 게 일반인들인지라 껍데기에 고개를 숨긴 자라 마냥으로 꽁꽁 숨은 채 위험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야참이니 하는 걸 챙겨먹는 건 그나마 마음이 태평할 때나 할 수 있는 일.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까지 엉망인 장사에도 신경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 눈은 오로지 도마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에 집중이 되어 있을 뿐인 것이다. 당장에라도 울릴 듯 울리지 않는 그 놈의 전화기를 노려보고 있자니 짜증이 다 날 지경이다. 그 망할 놈의 시건이 자식은 지금 핸드폰도 꺼놓고 잠적 중이다. 태규가 자기가 알아보겠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사실 마음 같아서는 가게 따윈 작파하고 내가 찾으러 나서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심혈을 들여 일궈놓은 파도 내팽개쳐두고, 지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여동생 시은이에게도 연락이 없었다. 기자 노릇 한다고 전국에 자기 사람을 깔아 놓은 태규 새끼조차 흔적을 찾을 수가 없는 눈치니 시간이 갈수록 사람의 피가 말랐다. 이시건. 너 혹여 무슨 일이라도 내기만 해봐라. 너는 우리들 손에 죽는다 이 새끼야. "때르르르릉." 마침 타이밍도 좋게 전화가 울린다. 급한 마음에, 액정을 확인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깜짝이야. 무슨 전화를 그렇게 받어?/ 전화 저편의 존재가 태연한 목소리로 핀잔을 준다. 시건이 새끼가 아니었다. 태규 놈은 더욱 아니고. 조금 실망스러워진 나는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전화는, 진석이에게서 온 것이었다. "할 말 있으면 직접 오지 왜 전화질이냐." 심기가 언짢은 데다가 원하던 전화도 아니다. 자연 곱게 나가지 않는 말에 전화기 저편의 놈이 침묵했다.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겠지. 놈의 숨소리가 거칠어 진 것 같았다. 그 숨소리 결에 색색거리는 샛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좀 이상한 일. …문득 태규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얼굴이 조금 굳었다. /건방지게 전화질해서 미안한데 직접 가지는 못하겠다. 여기 강화도거든./ 거칠어진 숨소리를 듣자니 뭔가 사단이라도 날 것 같은데 놈의 목소리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 말을 하면 서운해하기라도 해야 할텐데. 그래서 꼽냐는 소리 한마디는 해야 정상인데. 게다가 난데없이 있는 곳이 강화도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갑자기 웬 강화도?" /아아. 손님 때문에. 기분 안 좋은 일 있다고 다짜고짜 끌고 내려오네. 당분간은 못 올라갈 것 같아서 전화했어./ "니 얼굴 그 꼬라지가 되어 있는 걸 보고서도 데려가고 싶다는 년이 있든?" /………뭐?/ 놈이, 숨을 죽인다. 어딘지 모르게 놀라는 듯한 기색. 아무 생각도 없이. 어제 민희가 지나치게 난리를 치는 꼴이 기억나서, "여자들이란 그런 작은 상처에도 민감하던데, 그런 꼴인 널 보고도 강화도로 데리고 간 여자는 성격이 참 특이하구나."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놈의 반응이 영 미심쩍었다. 태연하게 농담을 하거나, 뭐라도 대거리를 해야 하는데. 그런 정상적인 반응은 다 어디에 놔두고 어째서 내 말에 저렇게 놀라 숨을 죽인단 말인가? 내 말 어디에 놀랄만한 구석이 있어서?? 작은 의문이 불씨가 되었다. 불현듯, 민희가 어제 했던 말이 다시금 생각났다. 진석이 놈에게 고작 밤톨만한 멍 두 개 낸 거 가지고 그 기집애가 안면 몰수하고 나를 닦달했던 장면을 천천히 리플레이 해보며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보기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작은 자욱일 뿐인데 그걸 가지고 그 난리를 치는 민희가 이해가 안되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하기만 해서, 그까짓 멍도 여자가 보기엔 꽤 큰 상처로 보이는 모양이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넘어 갔던 일인 것이다. 헌데 그걸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내가 껄끄러워하던 것 이상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산전수전. 제 말에 따르면 공중전까지 치러본 민희가 그까짓 멍자욱에 그렇게 흥분을 했을 리는 없는 것이다. 손님하고 대거리를 하다보면 기집애라도 코에서 피 터지는 건 예사로운 일이다. 제가 아무리 진석이를 끔찍하게 여긴다지만 고작 그 정도의 상처를 가지고 애가 그런 법석을 떨리는 없을 것 같다는 자각이 뒤늦게야 나를 찾아왔다. 이런 둔한 놈. 나는 민희의 태도를 예사롭지 않게 넘긴 것을 탓했다. 진석이 새끼는 어제 어딘선가 터져도 단단히 터진 꼴을 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민희에게 다시 물어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놈의 꼴은 민희가 오빠 소리하면서 따라다니던 나에게 그런 까탈을 부릴 정도로 심각했을 것이다. /뭐라고 이야기하는 거야. 지금?/ 한 타이밍이 늦게 놈이 대꾸를 한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다소의 짜증이 섞인 정상적인 반응. 하지만 늦었다. 내가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것으로 나는 놈이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놈은 자신이 얻어 터졌다는 것을 내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했다. 내가 놈의 꼴을 알고 있는 것에 당황하고 놀라고 있는 것을 보자면, 놈의 얼굴이 그 모양이 된 사연 또한 미심쩍기 그지없었다. "네 얼굴 말이야. 내가 밤톨만한 멍 두 개 냈다고 기집애들이 흉졌니 엉망이니 난리가 아니다. 빌어먹을 것들. 내가 그랬다고 자백했다가 그 년들한테 뜯어 먹히는 줄 알았다. 이것들도 이렇게 난린데 네 손님이라는 작자는 네 꼴을 보고 멀쩡하냐? 그 꼴을 한 놈을 뭐가 좋다고 강화도까지 데리고 날라? 그렇게 호스트가 귀하냐??" 미끼를 던졌다. 물기를 바라는 건지. 아니면 물지 않기를 바라는 건지. 도무지 그 마음을 알 수 없는 주제에 나는 놈을 시험하고 있었다. 놈은 조금 안도를 했는지 낮게 웃음소리를 냈다. /호스트가 귀한 게 아니라, 내가 그만큼 대단한 거지. 예술품에 흠 내고 그럼 멀쩡할 줄 알았어?/ "용천 지랄을 해라." /부러워서 하는 이야긴 줄 다 알아. 아, 애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형이 우리 가게 좀 들러서 어떻게 돌아가는 지 좀 봐줄래? 내가 한 며칠은 못 돌아갈 것 같은데 그쪽 분위기가 영 나쁘다 보니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못 돌아오신다라? …어째서? "눈치가 빤한 놈이. 그것도 지금 사정 어떤지 뻔히 알면서 하필이면 이럴 때 자리를 비워? 니 가게를 내가 왜 보고 있어야 하는 거냐고. 나도 내 장사에 바빠. 신경 못 써." /진짜 섭한 소리하네. 형 좋아하는 피데기라도 사 갖고 올라 갈 테니까 애들 출근이나 제대로 하는지, 행패 부리는 놈들이나 없는지. 그런 거만 좀 봐줘. 이쪽 손님이 꽤 대어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어서 그래./ 놈이 말했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짓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서. 코웃음이 절로 비어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놈이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참 뭐 같았다. 일전에.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하는 호스트 주제에 뭔 잔말이 많냐고 내가 퉁박을 주었을 때 놈이 뻐기면서 했던 말이 있었다. 남자가 배 내놓고 간 내놓고 저 하라는 대로 하면 흥 나할 여자가 어디 있겠냐고. 배짱 튕기고 퇴짜놓는 미인에 사내들이 불타듯이 여자들도 그런 거라고, 그렇게 말하던 놈이 이제와 엉뚱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아무 생각이 없다면 그대로 믿었겠지만, 지금은 놈의 행적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처지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새겨듣는 마당에 놈은 지금 믿기지도 않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 제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었으니 저런 허술한 거짓말로도 나를 속일 수 있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니 놈의 까탈스러운 성미에 여자 비위는 어떻게 맞추냐고 물었을 때 놈은 비법이라도 알려주는 듯 눈까지 빛내며 일장 연설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자기 사정 있을 땐 여자들에게 끌려 다니지 않고, 싫으면 제 쪽에서 퇴짜를 놓고. 끌고 당기는 게 연애의 매력이듯, 의사 연애도 줄다리기가 포인트라고. 게다가 형 말대로 온갖 여자들 비위 다 맞추어야 하면 나 정말로 이 장사 못한다고. 그렇게 말하던 새끼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 이제껏 단 한번도 여자 사정에 맞춰서 뭘 해 본 적이 없는 주제에. 왜 돈 내고 너 같은 폭군 새끼의 비위를 맞춰주는 거냐고 내가 되물을 정도로 지 맘대로 해 온 주제에. 이제와 거물 손님 비위 거스를까 두려워 자리를 비운단다. 거짓말을 해도 믿을 만한 걸 해라. 나는 지끈지끈 아파 오는 이마를 손으로 누르면서 생각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알게 된 것이 너무 많아서 도무지 정리를 할 수가 없었다. 눈덩이가 굴러나 산사태가 되듯이, 평온했던 나날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는지 느닷없이 소용돌이 치는 폭풍우의 한 가운데에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었다. 아니. 아니다. 나는 피해 망상적으로 흘러가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일이 일어나는 꼴을 볼 때 조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귀머거리 흉내를 내느라, 장님 흉내를 내느라. 눈앞에서 일이 일어나고 있어도 알아채지 못한 것뿐이었다. 일은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순서를 밟아가면서 차근히도. 점점 사건의 무게를 부풀려가면서. 다만 나는,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그게 뭔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왕 사려면 한 백접은 사와. 올 겨울 특별 메뉴나 마련하게." /미쳤군. 사람이 선물로 사가겠다는 말에 꼭 그 따위로밖에 대꾸 못해?/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해야지 연진석군. 이 형님께서 네 일을 대신 해 주시는데 엇다대고 건방지게 굴어. 통 크게 쓰던가 아니면 아예 선물을 말던가. 어쩔래?" /…댁한테 의지해보겠다고 생각한 내가 병신이지. 끊어!/ 물어 보고 싶은 게 많았다. 놈에게, 다그치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간신히 자제심을 발휘해 입을 다문 나는 최대한 여상스러운 어조로 대꾸를 했다. 어지간히도 염장이 질린 모양인지 진석이가 빽하니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끊는다. 평소와 다름없는.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운 전화통화(...)를 끝낸 후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태규한테 진석에 대한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진석에게까지 문제가 이렇게 갑자기 당면할 줄은 예상치 못했었기에 당혹감은 더욱 컸다. 놈이 지금 있는 곳이 정말로 강화도인가 하는 것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놈이 몸을 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이다. 어느 놈에겐가 얼굴이 엉망이 된 후에 바로. -맞았으면 열 배로 보복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 더러운 성미로 맞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는 것을 택했다. 상황은 생각보다 더 안 좋았다. 허나 더 불길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끝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일은 점 점 더 큰 일로 번져 가는 듯 했다. 이 어수선함이 이 후에 닥칠 큰 일을 예비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급해진다. 다시 한번 태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진석이 대정 쪽의 인물일지도 모른다던, 녀석의 그 당혹스러운 추측이 말이다. 그것도 똘마니 따위가 아니라 꽤 유력한, 이 근처 구역에서는 거의 완벽하리만큼 강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을 정도의 인물일 거라고. 어떤 계열인지 정확히 감은 못 잡았지만, 진석은 자기 가게 근처에서 다른 놈들이 소란스럽게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힘이 있는 놈이라고 했다. 본래는 이 동네에 있던 놈들의 아지트가 건너편 구역으로 건너간 것도 아마 진석이 때문일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놈과 태규가 말하는 놈의 갭이 너무 커서 헛웃음 밖에 흘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더 웃긴 것은 태규 놈이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놈은 결코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진석이가 그럴 리가 없다. 나는 강하게 대꾸했었다. 이 동네 근처를 이 전까지 잡고 있던 것은 백동영의 계열이라고 방금 이야기 한 것을 잊었는가 선우태규. 그리고 그 백동영이, 그 놈에게는 친어미나 다름이 없는 우리 어머니를 피 토하고 죽게 만든 놈이라는 것을 잊었는가. '백정새끼들의 심사를 어떻게 알아. 사람을 눈도 깜짝 안하고 죽이는 놈들이야. 핏줄로 연결 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믿어.' 나의 반론에 태규는 그렇게 대답을 했다. 내 동생이나 다름이 없는 연진석. 우리 어머니 품에서 잠을 자다가 온갖 소란 떨며 귀가한 험상궂은 중학생 형아에게 놀라 눈을 껌뻑이던 그 열살배기 꼬맹이를. 처음 만났을 때. 진석이는 고작 열 살이었다. 낮에 울기라도 했는지 때구정물 졸졸 흐르는 그 얼굴로 형님한테 인사하라는 말에 수줍음을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 품으로 숨던 녀석이다. 누구 탓인지 다 커서는 성격이 그 모양이지만 어렸을 때의 진석이는 눈처럼 순하고 하얀 놈이었었다. 내 인상이 험한 탓인지, 날 보면 울먹거리기만 하다가 쫄쫄이를 쥐어줘야 간신히 울음을 그치던 그런 꼬마. 처음으로 아무것도 안 쥐어줬으면서도 놈을 웃겼을 때 나는 진짜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안 따르는 강아지를 길들인 듯 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날 보고 배시시 웃는 그 작은 얼굴이 너무 앙증맞아 이런 게 진짜로 커서 나처럼 되나 싶은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그런데 놈은 감히 진석이를 그런 식으로 취급을 했었다. 그 애가 어찌 커 온 지 내가 아는데. 그 녀석이 어떤 성격인지,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우리 진석이다. 내 진석이다. 나랑 우리 어머니가 친 핏줄처럼 키웠던 소중한 아이가 바로 진석이다. 진석이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으면서 생각했다. 놈은 태규가 말하는 것 같은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놈은, 제 어미를 죽인 남자의 밑에서 순순히 고개를 숙일 정도로 비굴하지 않다. 그럴만큼 속이 없는 새끼가 아니다. …그리고 혹여. 정말로 만에 하나라도. 태규의 말이 옳더라도 나는 놈을 믿을 터였다. 놈이 정말로 그랬다면 녀석에게는 그래야만 할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설사 놈이 정말로 백동영의 밑에서 그 수족노릇을 했었을지라도. 놈에게는 내가 납득할 수 있을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건 자기 위안용의 생각이 아니었다.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굳이, 믿고 있다고 말로 표현하는 것이 구차스러울 정도로. 진석이는 내 동생이다. 내 형제다. 내 어미가 젖을 먹여 키운 것이나 다름이 없는 나의 젖형제다. 그런 아이를 단지 정황만으로 의심할 수는 없었다. 설사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걸 믿지 않을 것이다. 놈이 제 입으로 내게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또한 제가 숨기고 싶다면. 제가 저 지경이 되어서까지 내게 입을 다물겠다면 나도 모른 척 해주겠다. 나는 그렇게도 생각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자식." 허나 속이 쓰렸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도, 그 놈의 자식이 엉망이 되어 쫓기고 있을 거 라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어느 지방에 있는 건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인지. 쫓겨 본 나는 쫓기는 상황의 처절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전국구 조직. 일반인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는 그 힘을 겪어 본 나는 그 힘이 짠 그물망이 얼마나 견고한 것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물론 진석이는 주먹을 못 쓰는 놈이 아니었다. 요령도 좋을뿐더러 감도 좋아서, 아웃복싱 스타일로 안 맞고 싸우는 데 이골이 난 주먹패인 것이다. 나랑 내 친구들이 안다는 게 고작 싸움기술일 뿐이라서, 애를 데리고 논다는 게 기껏해야 그따위 잡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생각 없는 깡패새끼들 때문에 밀면 그냥 굴러갈 것 같은 애기 때부터 그런 걸 배웠던 놈이었다. 어지간한 놈 한 둘 정도와 붙었다고 해서 질만한 놈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새끼는 그냥 주먹 좀 쓰는 일반인일 뿐 '그들'과는 다르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족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이지, 나 같은 놈들이 우글우글한 집단에서 쫓기고 있을 때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그러기에 그쪽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살았는데. 그 무서움과 더러움을 익히 알고 있기에 진창에서 발을 빼기 위해 그토록이나 노력했는데. 놈 보다 깊게 빠져 있던 나는 스스로를 빼내는 데 너무 바쁜 나머지, 진석에게서 조짐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호스트. 가게. 놈이 데리고 있는 아가씨들. 내 눈을 가리기 위해 늘어놓은 장신구에 홀린 나는, 놈이 정말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 집은 단골 대접이 유별나군." 구석에 말 없이 앉아 소주를 들이키고 있던 남자가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남의 상념을 깨는 이 자식은 내가 일산파의 두목이리라 의심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온갖 생각을 가라앉히려고 눈을 감고 있다가, 놈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워낙에 속이 어지러운 탓으로 처음에는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듣지 못했을 정도였다. "뭐라고 했소?" "…이 집은 단골 대접이 유별나다고 했어. 우동 한 그릇 더 달라는 이야기 못 들었나?" 남자가 눈썹을 휘어 올리면서 차분하게 대꾸한다. 곱상한 눈가. 근질거리는 입매. 누가봐도 물장사 하는 사람 아닌가 할 정도로 묘한 색기가 묻어 나는 사내였다. 허나 얼핏 본 것으로 사람을 알 수가 없다. 저런 종류의 남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처음 볼 때는 무심했던 나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이 남자가 영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된 게. 자세히 뜯어보면 볼수록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인간이라는 생각만 여실하게 든다. 이제는 일산파의 보스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조그마한 조직에서 키울만한 놈이 아니었다. 이런 그릇은 고작 요정도 그릇 싸움에 열을 올릴 인물 따위가 아니며, 어느 조직의 숨은 계열 따위에 안주할 인간은 더욱 아니었다. 나이는 보면 볼수록 더욱 들어 보였다. 처음에는 진석이 또래 정도로만 봤지만 몇 번 보고 나니 내 나이 또래 이하는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든다. 남자의 인상은 해사하고, 느낌은 나른했지만, 남자의 눈 안에서는 뱀처럼 차가운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광기보다도 무서운, 내면으로 가라앉은 치밀한 냉기. 사람을 잘못 봐도 이렇게 잘 못 볼 수가 있었을까. 나는 남자에게 말없이 우동을 말아주면서 남자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남자는 절대로 일반인 따위가 아니었다. 남자의 몸에서는 사람을 죽여본 자의 냄새가 났다. 사고나 우연으로가 아니라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힌 자들에게서나 볼 수가 있는 음습함. 이를테면, 살기(殺氣). "무슨 근거로 댁이 단골이라는 거요." "이 정도로 들렀으면 얼굴 박을 때도 되지 않았나. 그럼 언제나 단골 취급을 해줄 거지?" 남자가 말했다. 농조의 어조였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상대를 주시하는 기색을 띈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 그를 비웃었다. 그래. 나를 도발하겠다. -그래서 어쩌겠다고, 이 깡패 새끼야? "단골을 결정하는 건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야. 댁은 아직 멀었어." "매일 들러도 이 모양이라니. 그 기준 참 까다롭군. 대체 얼마 정도를 더 와야 단골이라 그러지?" "얼굴에 인이 박히면." "앞으로 더 자주 와야겠군." 남자는 온건한 대화내용과는 어울리지 않게 살벌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고 이야기를 끊었다. 나는 놈이 우동가락을 입안으로 집어넣는 꼴을 바라보며 분을 삭였다. 남자는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거의 매일을 출근하다시피 하는 처지였으니까 아무리 무심한 인간이라도 놈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일상적인 포장마차 주인이라면 정말 단골이라고 여길지도 몰랐다. 나조차도 요 근래의 일들이 아니었다면 남자를 여상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따져 생각해보면 남자는 참으로 묘한 손님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있던 단골도 다 끊기는 마당에 하루에 한번씩 찾아와 간단한 안주거리와 소주 한 병을 비우고 가는 게 남자였다. 공교로운 시기에 나타나서 이상한 행동만 하고 있는 것이다. 하필이면 일산파가 이 거리를 접수한 시기에 나타나서, 다른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죽이면서 칩거하는 마당에 홀로 거리를 활보하는 남자다. 과시라면 과시고, 어떻게 보면 누구에게 퍼포먼스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남자의 공연 대상이 누구인지 짐작할 만했다. 태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진석이의 행동에 의해 짐작이 가는 바대로라면 남자는 진석을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진석의 약점으로 지목 받은 타겟은 다름 아닌 나인 모양이었다. 감방 갔다 와서 포장마차나 하고 있는 우제열. 연진석의 친형이나 다름이 없는 인간. 제가 이 구역 주인이라는 티를 안 내려고 그렇게 발버둥 친 주제에, 내게는 자릿세 뜯는 시늉조차 안 했던 게 진석이었다. 그들의 눈에 내가 이채롭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필연일런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허허로운 웃음이 났다. 눈앞의 남자는 백승언의 똘마니라고 믿기에도 거물인 인간인데, 직접 나서서 위협을 해 주셔야 할 정도로 진석이가 귀하신 몸이었을 줄은 미처 몰랐던 나였다. 진작에 알았다면 잘난 동생 등에 업고 유세라도 좀 해볼 것을 그랬다. 뒤늦게 알아서 아쉬운 게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닌 듯 하다. "소중한 사람이 있나." 놈은 우동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우고 나더니 선문답처럼 물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서 모종의 임무를 띄고 온 모양인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정도 기세라면 내가 놈의 정체를 대강 눈치챘다는 것을 알만도 할텐데, 그는 지극하게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왕년에 좀 놀았던 건달 놈 눈치 따위를 현역이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나라도 십 몇 년 전에나 건들거리던 동네 양아치를 겁내하지는 않을 터이니까 말이다. "그딴 건 왜 물어." "내게는 있어서 그래. 손님이 대화를 하자는데 너무 박한 대접이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포장마차 왔으면 우동이나 처먹고 가." 내 대답은 얄짤없었다. 너랑 놀아줄 정도로 내가 한가한 것 같으냐. 진석이 새끼가 뭔 짓을 하든 이해한다고 해서 나를 하해 같은 이해심의 소유자라고 생각한다면 섭섭한 노릇이다. 나는 한다면 하는 인간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내게 딴지를 거는 인간에게는 그다지 자비로운 성품이 아닌 편이었다. "혈기가 왕성하군. 마음에 들어. -서운하게도, 진작에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나의 험악한 대꾸에도 놈은 엉뚱한 소리만 했다. 나는 내 복장을 지르려는 의도로 딴 소리 하는 것만 같은 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놈은 의외로 쓰게 웃는 얼굴을 하고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살벌함으로 눈을 빛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인간 같은 얼굴을 한다. 허점을 찔린 기분이라서 순간적으로 눈빛이 흔들렸다. 그걸 봤는지 못 봤는지 남자는 홀로 중얼거리는 독백을 계속할 뿐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아무래도, 놈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다행이야. 이미 마음을 결정한 후에 만나서.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흔들렸을지도 모르겠어. 결정하지 않고서 너를 만났다면. 그랬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며 조용히 물러나는 관객 따위의 행세를 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난 한번 결정한 것은 바꾸지 않는 주의거든. 미안해." 눈꼬리가 접히게 놈이 웃었다. 하지만 놈이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음이 뭐 어쨌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 너 지금 유행가 가사 짓냐. 도통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채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나를 바라보던 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킬 수 있으면 지켜봐. 하지만 나는 가져갈 거야." "무슨 헛소리냐 씨팔 놈아. 알아듣게 말해." "보석은 알아보는 사람의 눈에만 보석이지.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돌에 불과 하잖아? 진귀한 돌은, 내가 가지고 가겠다는 거야. -이건 선전포고야. 나를 가로막는 막강한 벽에게 한번쯤은 신사답게 결투해보고 싶었거든." 놈은, 끝까지 헛소리를 하다가 포장을 걷고 사라졌다. 나는 저 새끼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에 놈이 진석이에게 전하라고 암호를 지껄인 건가 하는 의심까지 하고 말았다. 난데없이 무슨 보석이 어쨌다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돌이면 돌이지 진귀한 돌은 무슨 돌이냐. 진귀한 돌이 있으면 그럼 가짜 돌도 있을- "-이런 썅." 진귀한 돌. 무식한 그 새끼는 잘난 척 진석이를 그렇게 표현했다. 진귀한 돌이 진석이라고 친다면 내용이 대충 돌아는 간다. 쌈박하게 표현을 해보자면, 진석이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뭔 겉멋이 들어 헛소리가 그리 많은지는 몰라도 요약하자면 저 위의 한 줄이 고작인 거였다. 별 씹어먹게 하찮은 놈을 다 보겠네. 나는 열이 받쳐서 혼자 중얼거리면서 말했다. 이야기를 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사람 이름을 알려면 제대로 알던가!! "진귀한 돌 좋아하네 망할 자식!" 진석이네 아비가 아무리 인간 말종이라도 애 이름을 진짜 돌 따위로 지었을 까닭이 없었다. 진석이는 붉을 진(縉)에 연못 석(澤)자를 이름 한자로 쓴다. 지 어머니가 태몽으로 연꽃이 가득 핀 웅덩이를 보고 지었다는, 나름대로는 소중한 이름인 것이다. 놈이 제 부모에게 받은 것은 제 몸뚱이하고 그런대로 정성 들여 지은 이름뿐이다. 놈이 얼마나 진석이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진석이 놈이 저 놈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놈의 목을 따고 말았을 터다. 진석이 놈의 그런 사정을 뻔히 알기에 나는 남자의 말장난질이 심히 불쾌했다. 남의 귀한 이름을 갖고 그 따위 장난을 해?? 한자 중에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걸 티내냐? 애 이름 듣고 겨우 생각한 게 진귀한 돌 따위야?! 엉뚱한 화풀이로 속을 썩여도 머리는 냉정했다. 저 남자는 제 말대로 내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고, 머리 좋은 진석이 놈이 서울 땅을 사수하지 못하고 몸을 피한 것은 정말로 그 수밖에 제 몸을 간수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일 터였다. 작정을 한 놈들에게서 진석이 무사히 도망 다닐 수가 있을 것인가가 가장 큰 문제였고, 저 새끼들이 하는 행패에 다른 사람들이 다치지 않을까가 두 번째 문제다. '엿 바꿔 먹을 놈. 그러고보니 애들 걱정한 이유가 따로 있었군. 나더러 그 녀석들 방어막이라도 되 주라 이거냐? 그 새끼들 작정 앞에서 애들 도망 보내라고?' 피데기 백접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중노동을 시켜놓고는 뭐가 잘났다고 팩 거리면서 끊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돌아가는 사정을 대충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은 몰라도, 돌발 상황이라도 일어나면 내가 뭔가 조치를 취할 거라고 믿어준 거 같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게 애들을 맡긴 것이겠지. 나에게 그렇게까지 숨기는 것을 보면, 최후의 최후까지 내게 일이 돌아가는 걸 막고 싶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라. …너 그럴 정도로 절박한 모양이구나 연진석. 그렇지? 하긴. 방금 봤던 저런 놈을 적으로 돌렸을 정도니 오죽이야 하겠는가 만은. 허리를 쭉 펴고 한숨을 쉬었다. 생각이 난무하던 머릿속이 차츰 정연하게 돌아간다. 언젠가는 진석이 놈에게 빚잔치 할 줄 알았지. 쓰디쓰게 웃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돈이 아니라 용역으로 갚을 줄은 미처 몰랐지만, 예상은 하고 있었던 바였다. 원래 세상엔 공짜란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 죽어라고 쓰고, 고칩니다. 아하핫. 봐주시는 모든 분께 러블리 하트. 가장 완벽한 아침 08 "너희들 다 죽일 거야. 개새끼들!!" 한 발 늦었다. 진석이의 가게는 내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뒤집혀진 후였다. 흉흉한 대머리에 씨름선수 저리 가라할 몸매를 가진 놈들이 손님을 다 내쫓은 터라 가게에 남은 것은 몇 안 되는 애들뿐이었다. 고정도 있고 아르바이트도 있었는데, 아마도 도망가다가 걸린 모양인지 한 대씩 얻어터진 티가 난다. 사내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여자를 치냐고 하겠지만, 이 새끼들은 사람 치는데 남녀노소 가릴 정도로 체면 있는 놈들이 아니다. 필요하면 어린애라도 잡고, 시키면 남의 집 유부녀도 강간하는 놈들이 아닌가. 나는 우득 소리가 나게 손을 꺾었다. 한동안 실전이 없어서 몸이 제대로 말을 들어줄지 모르겠다는 걱정이 뒤늦게 들었다. "거 말 많네. 잡년이. 얼굴은 곱상한 년이 왜 이리 입이 걸레야. 썅. 너 진짜 이 오빠한테 죽어볼래?" "지랄 꼴값을 떨어라. 어딜 만져 개새끼야. 돈 내고 만져. 화대 치를 돈도 없어 강간이나 하고 다닐 씹새끼들이 누굴 건드려!!" 민희가 바락바락 악을 쓴다. 진석이가 없으니 민희가 마담노릇을 한 모양인데, 그래서인지 대표로 걸린 모양. 예쁘장한 기집애라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걸 모른 체 하고 치맛속에 손을 들이밀었던 한 놈이 악 소리를 내며 몸을 물렸다. 민희가 놈의 귓전을 오지게 물어뜯었기 때문이다. "이 쌍년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민희가 나가떨어진다. 이런 주리를 틀 놈들이 있나. 조그만한 기집애가 나가떨어지는 걸 보니 눈에 불이 붙는다.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의자를 집어 든 나는 놈의 등을 그걸로 내리찍었다. 믿고 살 거라고는 제 몸 밖에 없는 애들인데 이 잡것들이 그걸 공짜로 처먹으려고 들어? 양심이 있어봐라 이 새끼들아. "이 새끼는 또 뭐야." 의자로 내려찍고, 엎어지는 놈에게 다시 의자를 내던졌다. 머리를 정통으로 얹어 맞은 새끼가 그대로 쓰러진다. 워낙에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기습이라서 여자애들 끼고 낄낄거릴 생각으로 달떠 있던 놈들의 대응이 늦었다. 상대는 다섯에서 순식간에 넷이 됐다. 이만하면 해 볼만하지. 부셔져서 다리만 남은 의자를 뱅글, 손안에서 돌리며 나는 놈들을 쳐다보았다. "오빠!" 민희가 소리를 지른다. 그래 오라버니 오셨다 이 기집애야. 힘도 없는 게 왜 바락 바락 덤비고 지랄이냐. 그러다가 맞아서 골병들면 너만 손해구만. "오호라. 네가 이 기집애 기둥서방이냐?" 내가 놈들을 노려보고 있자니 개 중에 한 놈이 거칠게 묻는다. 민희와 내가 아는 사이라는 것에 흥미가 돋는 모양이었다. 나는 픽 하니 웃으면서 그 말을 되받았다. "방금 못 들었어? 오래비라잖아. 기생 오라비다 이 새끼야. 떫냐?" "뭐 이런 새끼가-." 길게 끌어봤자 불리하다. 이 놈들이 어느 조직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을뿐더러 인원이 얼마나 더 와있는지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놈들 아지트가 어디쯤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와 붙는 것처럼 짜증스러운 일도 또 없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열 명 스무명을 어떻게 이기겠나? 이 일대가 온통 그 밭이라고 생각하는 게 그 비슷 할텐데 나는 그 놈들을 다 쓰러트릴 방책이 없다. 나는 삼두육비의 괴물이 아니다. 진석이 자식은 내게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 놈을 타겟으로 잡고 선방을 날렸다. 말을 하다 말고 턱주가리를 맞은 놈이 불 맞은 멧돼지처럼 달려나온다. 새끼들이 한번에 한 놈씩 오는 게 아니라 갑자기 떼로 덤빈다. 빠른 시간 내에. 다른 새끼들이 오기 전에. 이 놈들을 싸그리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이를 악 물자 마자 등허리를 각목으로 맞았다. 오랜만에 받은 그 둔중한 타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고맙다. 나는 발을 올려 내게 각목을 선사해준 새끼의 사타구니를 후려차며 빙긋 웃었다. 오랜만에 움직여서일까. 한동안 그쪽하곤 상관없이 지내던 몸에 열이 후끈하게 치밀어 오른다. 손발이 둔하긴 해도 타격감은 제대로다. 대신 회피력이 떨어져서 옛날보다 많이 맞는 것 같았다. 기집애들이 합창처럼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내가 놈들 잡고 있는 사이에 도망이라도 갔으면 좋으련만은. 내가 이긴다고 철썩같이 믿는지 소리만 지르지 어디 갈 생각을 안 한다. 눈치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정신 없이 싸우는 와중에서도 알아들을 만한 것은 민희의 목소리였다. 기집애는 내게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찰을 부를 생각은 안하고 작고 앙증맞은 주먹까지 휘두르면서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 그 새끼들 확 조져버려!!!" …고맙다. 민희야. 경찰이 싫으면 새콤이라도 불러주길 바랬는데, 내 기대가 아무래도 지나쳤던 모양이었다. 저 녀석은 아마도 내가 김두한이나 스라소니 쯤 되는 줄 아는 모양인 것이다. 꼼짝없이 혼자서 이 놈들을 다 쓰러트려야 겠구나. 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고 말았다. 애들이 도망이라도 가면 상황 봐서 몸이라도 빼려고 했는데. 애들이 도망을 안가니 이 놈들을 다 처리하고 나서 내 손으로 애들을 대피시켜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내 팔자는 어째, 사사건건 이 모양이었다. "애는 좀 괜찮아?" 나는 내 등에 업힌 수진이를 살피는 민희에게 가만히 물었다. 편의점에서 사온 생수에 손수건을 적셔 수진이의 얼굴에 묻은 피딱지를 닦던 민희가 나를 돌아보더니 쯧하니 혀를 찬다. 그리고는 수진이의 얼굴을 닦던 수건으로 내 이마를 눌렀다. 놈들에게 터져 피가 배어 나오는 이마에 차디 찬 물기가 달라붙었다. "놀래서 기절은 했지만 괜찮을 거예요. 보기만 이렇지 많이 맞은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오빠는 괜찮아요?" "두 발로 멀쩡하게 걸을 정도는 된다. 진석이한테서 연락은 없었어?" "오늘, 아니 어제 저녁에 잠시 자리 비운다고 연락은 왔었어요. 오빠가 장사 봐줄 거라고 그래서, 제열이 오빠 그 성격에 우리 장사 뒤를 잘도 봐주겠다고 웃었는데……아마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그랬나봐요." 민희가 시무룩하게 대답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추측에 동의를 할 수가 없었다. 아마 진석이도 일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갈 줄은 몰랐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애들보고 가게문 닫으라고 했을 테니까. 하지만 일의 진행은 재빨랐다. 나는 물론이고 진석이조차 예상을 하지 못할 만큼 거칠고 빠른 템포로 일이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진석이는 정말로 백동영의 계열이었던가 보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놈이 이렇게 철저한 정리 대상에 오를 까닭이 없었다. 이건 거의 숙청의 수준이 아닌가 말이다. 그 동네 살벌한 거야 진작에 알았지만, 주위까지 초토화시키는 그들의 수법에는 짜증이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당분간 가게에 나오지 말라고 돌려보낸 여자애들은 그냥 일 하러 나오는 애들이지 조직하고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쪽이었다. 그런 애들까지 개 패듯이 패고 놈의 사업장을 완전히 부셔놓은 것이 놈들이었다. 다른 이름으로 재개장하기 전에는 아마 아무도 그 가게를 찾지 않을 것이다. 조직폭력배에게 찍힌 사업장을 즐겁게 방문할 손님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여기가 오빠네 집이예요?" 민희가 말했다. 수진이는 제사 때 몇 번 왔지만 민희는 내 집이 처음이다.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집은 아니라도 내 방은 맞았다. 이 옥탑방이 내가 녀석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은신처였다. 그러고보니 옥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주인 아주머니와 마주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딱 봐도 나가요로 보이는 차림의 여자애 둘에다가 피떡이 진 상처를 가진 장신의 사내를 봤다면 혈압으로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아니면 당장에 노발대발하며 방 빼라고 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씁쓸해진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땄다. 내가 열어 주는 문을 통해 먼저 방으로 들어간 민희는, 서둘러 이부자리를 폈다. 나는 그 위에 수진이를 내려놓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제대로 맞아 뻐근한 등허리로 정신을 잃어 축 늘어진 애를 엎었으니 힘든 건 당연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도 꽤나 다친 주제에 민희의 행동은 재빨랐다.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수진이의 옷을 벗겨서 속옷차림으로 만들더니, 이불까지 꼼꼼하게 덮어준다. 동갑이라도 민희는 야무진 성미라서 수진이에게 언니라도 되는 양 굴고 있었다. 생긴 건 저래도 원래는 정이 많은 애다. 저도 지쳤을 녀석이 수진이를 꽤 꼼꼼하게 챙기는 것을 보고 어쩐지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지친 얼굴을 한 민희가 내 앞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나도 찢겨지고 땀에 절은 윗도리를 벗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다행히 놈들의 마수에서 한번은 벗어났지만 두 번은 힘들 거라는 예상이 내 안색을 어둡게 했다. 이쯤에서 이쪽을 무시해줬으면 좋겠는데. 나야 상관이 없지만, 자기 생활 있는 애들은 가게 주인 잘못 만난 죄로 생고생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판국이었다. '아무리 봐도 인질을 생각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랬다면 거기서 죽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했을 리가 없잖아. 그냥 아무 애라도 하나 잡아서 데리고 갔으면 그만이지. 하지만, 이 애들이 인질의 가치가 있나? 일반적으로 생각해봐도 놈은 그저 포주일 뿐인데. 작정을 하고 튄 놈인데 가게 애들이 좀 다친다고 되돌아 올 리가 없는 거 아니야. 그 놈들도 분명,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그런데 왜 사업장을 부쉈을까. 어차피 알맹이가 빠져나간 껍데기에 불과한데. 애들은 왜 이렇게 엉망으로 패서 겁을 준거지? 그래서 얻을게 뭐가 있다고.' 나는 놈들의 저의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진석이가 애들 걱정은 해도 이 꼴은 예상치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굳이 놈들이 이렇게 일을 벌이는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진석이의 행방을 물었으면 또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고. 그저 애들을 때리고 손님을 내 쫓는 것뿐이라니. 그래봤자 가게 부서지는 것말고 진석이가 무슨 손해가 있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제 목숨 귀한 줄 아는 놈이면 가게 따위야 어찌 되든 말든 천리 만리로 달아날 것인데. 뒤늦게 가게를 부셔봤다 화풀이 밖에 더 되겠- 아, 혹시. 그래서인가. 머리를 굴리다보니 실마리가 잡히는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의 이익으로써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내다볼 때, 놈들의 행동에는 일리가 있었다. 놈들은 진석이가 이미 서울 땅을 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헌데도 난장을 부린 거라면, 가게를 부순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 곳이 없으면 진석은 이 거리로 되돌아 올 명분이 없다. 놈들은 진석의 근거지를 아예 없애려고 그런 수작을 한 것이었다. 지금쯤은 진석의 아파트도 다 뒤졌을 터였다. 어쩌면 등기조작이라도 해서 자기들 마음대로 아파트를 처분 했을지도 모른다. 진석이 서울에서 발 붙일 땅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이야." 하지만 내 생각만으로 단정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스스로에게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은 넘칠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쪽으로는 머리를 굴리려고 하지 않은 탓에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의 조짐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내가 아닌가 말이다. 일이 이지경이 되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원통한 일이었다. 나는 내 생각을 단정하기보다는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기로 결정했다. 이야기를 하는 폼을 보아하니 민희는 그래도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 놈들 대체 뭐였어?" 애들 빼내는 데 급급해서 놈들의 입에서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민희는 커다란 눈동자를 굴려 수진이를 힐끗 바라보더니 녀석이 아직도 잠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는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직감적으로 수진이와 관계가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챈 나는 불길한 기분에 숨을 죽였다. "대연금융요." …역시. "그 새끼들이 왜?" "수진이 빚 때문에요." "수진이 빚?" 불길한 예감은 항상 맞는다. 제기랄. 대연 금융이라니.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뭔가 시간대가 안 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거긴 일이 나기 전에 이미 진석이가 해결을 봤을만한 곳이었다. 그런 일에 뜸을 들이는 놈이 아니니 당일날 당장에 일을 끝냈을 텐데. 날짜를 따져도 그렇고 시기를 따져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 놈들이 이제와 날 뛸 이유가 없었다. 수진이가 그 짧은 기간 안에 그 놈들에게 다시 돈을 빌렸을리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거 진석이가 갚았을 텐데." 나는 당혹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민희는 화가 난 듯 턱을 치켜들면서 말했다. "저두 알아요. 수진이도 사장님이 해결했다고, 이제 그런 데서 돈 끌어쓰지 말라고 이야기하셨다고 했단 말이예요. 그래서 그렇게 말했는데도 그 개새끼들이, 그 잘난 사장 어딧냐고. 돈 갚았으면 영수증 있을 텐데 그거 내놓으라고 지랄을 떨었어요. 분명히 갚았을 건데 사장님이 없다고 생 거짓말을 하잖아요. 개 씨팔놈들. 우리 사장님이 어디 그런 거 가 지고 거짓말 할 사람이에요? 돈 관계만큼은 그렇게 깔끔할 수가 없는 사람인데. 백 사장 살았을 땐 우리 사장님께 설설 기더니, 이제는 완전히 안면 몰수 해 가지고. 내가 보기에 이건 완전히 토사구팽이라구요. 이용해 먹을만큼 이용해 먹었다 이거지. 지들이 백 사장 어떻게 뒤집어엎었는지는 생각도 안하고." …민희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토사구팽이라. 나는 단순히 진석이 백동영 계열의 핵심 간부이기 때문에 숙청을 당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민희는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태규도 모르고, 나도 몰랐던 진석이의 일. 그것을 그녀는 알고 있는 듯 했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진석이가 말하지 않으면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고 결심을 해 놓고는, 작은 힌트에도 이렇게 마음이 흔들렸다. 놈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하게 여겨졌고, 놈이 진정으로 무슨 이유로 쫓기는 지에 대해서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린다. 물어봐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모르는 척 흘려 들어야 하는 건가. 도의와 필요성 사이에서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그 새끼들, 그 따위인 거 한 두 해 일이냐." 믿어야 한 대놓고 이게 무슨 꼴이냐 우제열. 나는 민희의 말에 맞장구치는 듯 하면서 슬그머니 떠보는 자신에게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믿겠다고 했으면 믿어. 진석이 새끼가 그동안 이야기를 안한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 놈 선택 좀 믿어주면 안되냐? 똑똑한 놈이라는 거, 지 앞가림은 알아서 할 놈이라는 거 알고 있잖아. 마음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떠돌았지만 가증스럽게도 얼굴은 평온했다. 마치 민희가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제 분에 취해 있던 민희 자식은 분한 듯 숨결을 높이면서 종알거렸다. "그래도 그 사람까지 그럴 줄은 몰랐죠. 백승언이 그 새끼 혈통은 원래 그런가. 백 사장이 그러더니 그 새끼까지 그럴 줄 어떻게 알았어요? 지가 우리 사장님한테 약속한 게 있는데." 진석이, 백동영 쪽이 아니었어? 백승언 쪽이었어? 머릿속이 혼란해져 온다. 이제껏 생각했던 추리가 다 흐트러지면서 중심을 잡지 못한다. 태규 자식이 잘못 알았는지, 아니면 민희가 엉뚱하게 알고 있는 건지. 나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열심히 분석하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더 들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그런데 지 놈이 어떻게 이렇게 뒤통수를 때려요? 내가 보기엔 수진이 빚이니 뭐니 하는 것도 다 그 자식들 수작이에요. 오빠가 보기엔 얘가 대연 같은데 기어 들어갈 용기가 있어 보여요? 사장님한테 빚지는 것도 전정 긍긍하는 기집애가 그런 사채를 무슨 간담으로 빌어써요. 보나마나 그쪽에서 슬그머니 접근했을 거야. 우리 사장님 약점 잡으려고. 그럼 그게 벌써 언제예요? 백사장 황천 가기도 전의 일 아니에요. 그렇다는 건 우리 사장님 정보 물어다 주는 거 다 받아 쳐 먹으면서 뒤 칠 궁리나 하고 있었다는 거죠. 지가 우리 사장님한테 어떻게 그래. 우리 사장님 아니었으면 백동영이 깔아놓은 비밀 라인 하나도 몰랐을 거면서." -연진석이 이 새끼. 너 프락치까지 했냐? 나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짚었다. 가지가지 하는 구나 연진석. 한 다리 걸쳐도 모자랄 판에 양다리를 걸쳐? 진짜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놈이잖아!! 기가 막혔다. 너무 화가 나서 그 놈들이 녀석을 잡기 전에 내가 먼저 잡아 족치고 싶은 기분이 다 들 정도였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건지. 똑똑한 줄로만 알았더니 헛똑똑이었나 보다 그 자식. 병신 천치다. 일이 끝나면 제일 먼저 제가 제거 될 거 몰라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십 년이나 그 동네에 있었으면 거기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 덴 지는 알았어야 할 거 아니야. 뿌리를 박았으면 잠자코나 있던가, 프락치? 네 주제에 간첩을 해?? 그렇다면 정말로 놈들이 하는 것은 토사구팽이 맞았다. 그 놈들이 어디 약속이나 지키는 놈들이던가. 게다가 진석은 상대편 라인에 있으면서 반대편으로 정보를 팔아넘긴 이를테면 배신자였다. 일이 끝난 후에 제거 대상에 오르는 것은 놈들의 일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보았을 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백동영이나 백승언이나 어쨌든지 간에 백씨 가문의 사람이다. 일이 일어난 내력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소문이 안 나는 것이 집안의 수치를 더는 길이 아닌가 말이다. 숙부가 제 조카를 치려고 했다는 것도 더럽지만, 조카가 숙부 약점 캐려고 프락치 심었다는 것 또한 과히 상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놈들이 진석이를 왜 쫓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놈은 그렇게 쫓길만한 짓을 스스로가 자초했던 것이다. 그 병신 같은 새끼가. …아마도, 어떻게 될 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헛웃음이 났다. 일을 쳐도 아주 제대로 쳤구나 연진석. 너 이 새끼.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형한테 한마디도 안 해? 복수에 눈이 먼 것은 시건이가 아니라 그 새끼였나 보다. 내 마음이 아니라 진석이의 마음도 헤아렸어야 하는 건데. 우리 어머니를 제 친어머니처럼 따랐던 진석이 새끼가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놈을 어떻게 해야 구할 수 있을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때르르르릉." 정신없이 전화를 받았다. 그 난장을 치르는 와중에도 주머니에 얌전히 들어 있던 폰을 찾아 꺼내든 나는 다짜고짜 송화기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연진석 너 이 새끼. 지금 거기가 어디야!!!" /…나 시건이다. 제열아./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수화기 저편의 상대가 입을 열었다. 나는 뜻하지 않은 상대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전화는, 잠수를 타고 있던 시건에게서 온 것이었다. 나는 놈의 전화가 생각보다 반갑지 않다는 사실에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이란 정말 간사한 동물인 모양이었다. ***** 제열이는 주인공이 맞아요. 주인'공'이예요. ^^ .........모두들 제열이가 수길 바라시더군요;;; 어째설까;;;;;; 아침 탄생 비화를 따지자면 이렇습니다. 모님 : (야오이 소설에 나오는 공수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 하던 중) 란마루 소설의 특징은 하나야. 다른 모님 : 뭔데요? (흥미진진) 란마루 : 뭔 소리 하실라고 그러세요. (약간 불안) 모님:공은 어쨌든 수보다 돈이 많아야 돼. 성격도 생김새도 기세도 아니고 오로지 그게 조건이지. 란마루 : 으하하하. 맞아요. 신데렐라 콤플렉스지. (어째 자랑스러워한다) 모님 : ;;; 나쁜 것. 가난한 사람들은 연애도 하지 말란 말이냐? 다른 모님 : 맞다! 모님 :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주인공마저 못되란 말이냐! 너는 반동분자야. 프롤레탈리아의 적!! 다른 모님 : 맞다! (.....말리는 시누이가...흑) 란마루 : ......(몹시 당황스러워 함) 모님 : 니가 진정한 해방전사(?)로 다시 태어나려면 가난한 공을 한번 써봐라. 그게 너의 남은 과제다!! 란마루 : 넵! (얼덜결에 대답. 명령형에 약하다;;;;) .............해서, 탄생한. 가난한 주인'공'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가장 완벽한 아침'입니다. (두둥)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부자로 설정되는 인물은 절대로 공이 될 여지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사건과 사람들. 여기서 마칩니다. 가장 완벽한 아침 09 서울에서 의정부시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비치 모텔은, 요 근래 새로 지어지고 있는 모텔들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그렇고 그런 흔한 모텔 중에 하나다. 어딘지 모르게 놀이공원에 세우는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한참 도는 유행이 지나고 나면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꼴을 한 전형적인 러브 호텔이라는 이야기다. 시건의 친절한 길 안내 덕에 헤매지 않은 나는 누구 말대로 '지하철에 내려서 5분 거리'라는 지리적인 위치를 차지한 모텔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사흘 간. 그러니까 공교롭게도 백동영이 자살을 하고 난 바로 그날 밤부터 종적을 감추었던 시건이었다.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 움직이는 것을 워낙에 좋아하는 까닭으로 생각나면 바람처럼 왔다가 가곤 하던 놈이었다. 서른 넘은 나이에 오토바이 모는 것 하나가 유일한 취미다. 그런 놈이 모텔 따위에 들어앉아 사람을 불러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다. 전화를 받고, 장소를 메모하면서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알아챘다. 이건 도무지 시건이 자식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제 오라비가 하는 일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걱정하고 있는 시은이에게조차 연락도 안한 데다가 답답하면 오토바이 몰고 전국을 누비던 놈이 모텔 방에 틀어박혀서 사람을 오라가라 한다? 근래의 일들이 심상치 않아 의심만 도졌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자칫하면 나까지 당하는 수가 있었다. 희생자 노릇은 한 번이면 족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똑. 똑." "누구십니까." "나야." 놈이 써준 모텔의 호수를 찾아 두드렸다. 달칵하고 잠금쇠를 푸는 소리가 들리고, 푸석한 얼굴을 한 시건이가 문을 열어 준다. 나는 놈의 눈이 번득이는 것을 보았다. 절망의 기색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에 사납도록 무서운 광망만 번쩍인다. 안색이 굳은 나와 눈이 마주친 놈은, 도무지 놈 같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일그러진 웃음을 보였다. 나는 나의 직감이 더럽게도 잘 맞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건이 이렇게 암울한 기색으로 사람에게 시선을 던지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나는 시은이의 골반이 바스라지고 질이 찢어져 영원히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는 의사의 선고를 들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시건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놈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한 칸짜리 작은 방안에는 기본적인 물품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더블 베드와 두 사람이 마주 앉을 수 있게 되어 있는 미니 소파. 그리고 포르노 채널을 무료로 원하는 대로 보기 위해 설치되었을 것이 틀림없는 대형 텔레비전. 그러나 방 안에는 그 적막하고 사무적인 것과는 완연히 이질적인 기운이 있었다. 탁한 담배냄새가 진동하는 공간에서 전해오는 그 이질감이 내 피부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의 신경을 따끔따끔하게 자극하는 긴장감이었다. 방안은, 특이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이질적인 공간이 되어 있었다. "오랜만이다. 작년 여름에 보고 처음이지? 잘 지냈어?" 녀석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나는 마주 손을 내밀어주면서도 녀석이 이렇게 이상하게 행동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놈의 손과 마주잡는 순간 손안에서 바스락거리는 뭔가가 잡혔다. 하. 종이라? 주먹을 쥐듯이 하면서 손안에 들어온 작은 종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 척 하면서, 종이를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건이의 형형한 눈빛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직감적으로, 나를 이곳에 부른 가장 큰 이유가 이 종이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숨기듯 건네주는 것을 보면 이 작은 방안조차 안심하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가 된다.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어?? 나는 이 방 어딘가에 감시 카메라가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건은 그러나, 몸이 굳어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내버려두고 짐짓 태연하게 행동을 했다. 그는 소파로 돌아가서 담배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았다. 항상 그랬다는 식으로. 담배가 아주 맛있다는 듯이 말이다. …시건이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 일을 당한 후 시은이는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걸려 몇 년간을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살았었다. 헌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렸을 때 있던 천식까지 재발해서, 그렇지 않아도 허약했던 몸이 거의 쇠약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담배 연기는 커녕 몸에 밴 담배 냄새만으로도 위독할 지경까지 빠져드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시건이는 담배를 끊었다. 우리조차도 놈의 옆에서는 담배를 필수가 없었다. 그런 놈이 지금 담배를 피고 있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등에서 한기가 흘렀다. "무슨 일 있어?" 나는 물었다. 놈의 행동 하나 하나가 눈에 아프게 박혀 든다. 이 놈은 나나 태규가 생각했던 것처럼 자의로 없어진 게 아니었다. 녀석은 지금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놈은 아마 제 발로는 이 모텔방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놈은 아마 제 스스로의 의지로 나를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앉아봐.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다." 놈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나는 그 표정이 연출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놈의 눈에서 보이는 조롱기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 그래? 나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그것이 묻고 싶었다. 네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잡혀 나를 부른 이유가 대체 뭐야? 냉정 하자고 생각했지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애써 분기를 누르며 나는 녀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녀석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이야긴데." "이 이야기, 가능하면 너에게 안 하려고 했어. 백동영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제 다 끝난 일이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듣자하니까 진석이가 서울을 떴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혹시나 해서 너 부른 거다. 알고 싶은 게 있어서. 너 지금 그 자식하고 연락이 되냐?" "뭐? 당연히 돼지. 뭐 그런 걸 묻냐." "다짜고짜 미안하지만 지금 전화 한번 해봐. 받는지 안 받는지."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예상치 않게 들은 진석의 이름 때문에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진석이하고도 연관이 있는 일이냐. 내 말없는 질문에 시건이 씁쓸한 눈빛을 했다. 그것은 말없는 시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시건이 잡혀 있는 것은 진석이 때문이었다. 내가 이 이상한 모텔방에 불려 온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진석이와 시건이 어떻게 얽힌 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이건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 틀림없는 일이었다. -헌데, 지금 상황에서 진석이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조직은 내가 알기로는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대정(大政). 대정이구나. 그제야 시야가 트인다. 시건이를 잡아 놓고 있는 인물이 누군지에 대해서도 그제야 확실하게 알 수가 있었다. 대정이었다. 이건, 백승언이 한 짓이다. 하지만 대체 왜?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연결고리가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차라리 나를 잡으면 몰라도 한 다리 건너인 시건을 왜 잡은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놈들에게는 훨씬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 텐데 굳이 왜 이렇게 번거로운 수고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삐익. 밧데리가 꺼져 있어 연결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의문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나는 마음의 동요를 숨기고 전화를 걸었다. 시건이 놈의 입을 통해 그들이 명령했으니까. 놈들의 의도가 그것인 듯 하니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석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놈들이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나. 의문이 가득한 눈을 놈에게로 돌렸다. 아마도 놈은 진석이 전화를 꺼놓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렇다면 그 이유도 알 터이다. -아니 적어도. 그들이 그 '이유'라고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터였다. "안 받아?" "그래." "역시-." 놈이 혀를 찬다. 나는 이 부분에서 놈에게 매우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본도 안 던져 주고 연극을 하라니. 나 같은 초짜에게는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래?" "혹시 요 근래에 녀석이 전화 온 거는 없었어?" "강화도 간다고 전화는 왔던데. 왜? 진석이에게 할 말 있어?" "달랑 그 전화가 고작이었어?" "그래. …무슨 일, 있는 거야?" 한없이 되돌이 되는 반복적인 의문. 내 궁금증을 부추기려는 의도인 것을 알면서도 짜증이 났다. 이만 하면 본론으로 들어가 줬으면 좋겠는데 싶은 기분이 든다. 허나 겉으로는 심상한 어조를 유지하는 척을 했다. 어리둥절한 듯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시건이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이 내 뒤에 붙은 거울에 힐끔 닿았다가 다시 나에게 향한다. 나는 그 사실을 눈치챘음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놈은 차가운 목소리를 하고 내 말을 받았다. "그 자식이 그럴 줄은 몰랐군. 적어도 너에게는 한 마디 말이라도 해 줄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너희들은 친형제나 다름이 없었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애가 강화도 좀 갔다 오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냥 여행 간 게 아니잖아. 너 걔 가게 부서졌을 때 있었다며. 니가 그 뒷수습 다 했다며? 그래놓고도 니가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진석이가 없어졌다는 이야기 듣고 애들 풀었어. 혹시나 싶은 기분에. 헌데 역시나구만. 그 녀석의 아파트 싹 빈 거 알고 있어? 매물로 내놨던데. 자기가 이사간다는 이야기 그 새끼가 하든? 아니 그것보다도, 우선 지금 당장 진석이에게 전화라도 해보는 게 어때. 핸드폰 녀석에게 연결이 되나 한번 확인을 해보라고." 빈정거리는 음색을 띄고 놈이 말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놈들은 아파트에도 손을 댄 모양이었다. 자기들이 미리 손을 써 놨기에 저리도 당당하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거겠지. 누군가의 각본인지는 몰라도 앞 뒤 순서를 아주 제대로 짰다. 작정을 해도 단단히 하고 일을 벌인 듯한 놈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욕설을 날렸다. 정말로 잡으려고 하는 거다. 백동영이 자살했을 때.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죽기도 전에 이미 시건이를 잡았을지도 모르는 놈들이었다. 일의 마무리를 확실히 하려는 거겠지. 나는 놈들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돌아갈 지에 대해서 골몰하면서 이야기를 정리해갔다. 백동영의 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석을 잘라낼 생각부터 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구린데가 많다는 것을 뜻했다. 아파트를 팔기 위해 내 놓은 것은, 어쩌면 진석을 죽여놓고 진석이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실종된 것으로 처리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당하고야 알았는지 미리 짐작을 했는지는 몰라도 진석이 튀어 버리고 난 다음에는 이런 용도로도 사용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니었겠는가. 이렇게 상황을 여러 가지로 이용하는 것을 봤을 때, 가게를 부순 것도 내가 생각했던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단순히 진석이가 그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 외에, 내가 보라고 일부러 그렇게 요란한 일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놈들은 그들의 각본에 나까지 엮어 놓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다짜고짜. 너 그렇게 한가하냐? 진석이 험담하려고 이 먼 도봉산까지 날 오라고 한 거야?" 어디.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짰는지 보자. 나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삼키면서 놈의 짓에 대거리를 해주었다. 시건이 입을 통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이제야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들의 새로운 각본의 주연이 나인 모양인데, 당사자인 내가 그 극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건지 몰라서야 말이 되는가? 그래. 날 어떻게 이용해먹고 싶으신가 백승언씨. 이렇게 공들인 꼭두각시극을 나라는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 준비해주기 까지 하다니 말이야. 진석이를 믿는 것처럼. 혹은, 놈들이 생각하는 데로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놈의 말에 신경질적인 대꾸를 했다. 시건은 답답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보더니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들어설 때부터 방안의 매캐한 담배 연기가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재떨이는 아주 깨끗했다. 방금 시건이 피운 것이 다인 것처럼 말이다. "우제열." "왜 이 자식아." "내 이야기를 듣고도 모르겠어? 너 바보 아니잖아. 진석이 일이라고 감정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냉정해져봐. 그 자식 가게도 내팽개치고, 집도 팔고, 그대로 사라진 거다. 네게 강화도에 있다는 전화를 했다지만 그게 사실인지는 누구도 몰라. 내가 너한테 끝까지 이야기 안 하려고 했던 일에. 입 떼게 된 것도 그래서야. 네가 가게 뒷수습까지 했다는 이야기 듣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 자식이 서울 뜬 거 아직도 이해 못하겠어? 그 자식 도망 간 거다. 너랑 친하다는 것을 그 쪽에서 아니까. 그쪽에서 혹여나 너에게 연락이 올까 하는 생각으로 널 주시할 거 아니까. 일부러 시선 끌 요량으로 너에게는 아무소리도 안하고 도망간 거야. 도마뱀이 자기 꼬리 떼 놓고 도망가듯이, 꼬리 대신. 너를 놔두고서. 내가 하나 맞춰볼까? 그 자식 너한테 가게 맡기겠다고 전화하지 않았어? 남 일에 간섭 안 하는 니가 가게 부서진 뒷수습을 한 것도 아마 그래서겠지. 아니야?" "-그건 대체 어떻게 알았어?" 젠장. 여기서는 망연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건가. 어차피 등 뒤에 카메라가 있는 듯 하니 표정 연기야 상관없겠지만 목소리 톤이 문제였다. 연극배우도 아니고 저 이상한 태도를 곧이곧대로 믿는 바보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었다. 웃기네 자식아, 약 먹었냐. 그 소리 한 마디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시건이 놈이 필사적으로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맞춰주려는 거지 평소 같았으면 그냥 아구창을 날려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해야 했다. 놈들이 의도하는 바대로. 시건이가 원하는 바대로. 시건이 말이 너무 당혹스럽고,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종류의 것이라 놀랍다는 듯이 당혹감과 어렴풋한 의심을 담은 목소리를 내 입에서 내야 했던 것이다. 말 없는 시건이 새끼가 느닷없이 연극배우가 되어서 저 긴 대사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로 할 바엔 차라리 자료를 보여주고 설득시키는 게 놈의 체질이건만. 놈이 평소에 하던 행동은 하나도 안 하는 데도 불구하고, 놈에게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고 놈이 하는 말만 고스란히 믿는 척을 해 보여야 했다. 굴욕 이전에 기가 막혔다. 나는 눈치도 없고 생각도 없는 머저리인가? 저런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친구 놈을 보면서도 순순히 다 믿고 놀라워하는 병신자식이 그들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웃기기까지 한다. "내가 그걸 왜 몰라. 계속 진석이 그 자식 주시하고 있었는데. 혹여나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니가 동생 같은 애라고 생각하는 거 알고 있었기에 참고 있었던 거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진작에 놈을 어떻게 했을지도 몰랐어. 그런데, 그렇게 봐 준 것도 모르고 그 개자식이 이제는 너를 미끼로 자기 혼자 몸을 빼? 자기 한 몸 호강하겠다고 사내새끼가 사내한테 후장 댈 때부터 알아 봤어야 하는 건데. 그것도 다른 놈도 아닌 백동영이 첩년으로 살 때부터, 그 새끼 싹수가 그 지경이라는 것은 알아 봤어야 하는 건데. 그 새끼가 십 년 가까이 백동영이랑 붙어서 그 짓 하는 거 보면서도, 네가 밟혀 차마 말을 못했었어. 헌데 그 아량이 오히려 이렇게 돌아오다니. 하. 그 새끼 인간 되길 바란 내가 그른 건가." "……이 씨팔 새끼야. 방금 뭐라고 말했어." 나는 순간적으로, 시건이 놈들이 시키는 대로 입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낮은 목소리를 냈다. 머릿속에 신경이 뚝하고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제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러나. 시건이 하는 말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쉽사리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내가 방금 무슨 몹쓸 소리를 들은 건가 싶고, 대체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딱 들어봐도 이건 놈들의 중상모략이었다. 꼴을 보아하니 내가 진석이에게 정 떨어지게 만들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러기 위해서 그런 험한 이야기를 지어냈을 터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녀석이 하는 말은 너무 터무니가 없었다. 진석이가 사내에게 첩질을 했다니. 그것도, 다름 아닌 백동영에게? 가소로워서 웃음까지 나오는 데도 불구하고 얼굴 근육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말도 안 된다. 나는 달아오르는 핏발 때문에 뜨거워지는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생각했다. 설사 내가 진짜로 놈들이 생각하는 그런 바보 천치라 해도 그런 말엔 속지 않을 터였다. 태규 자식이 처음 백동영의 밑에서 진석이 수족노릇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도 믿을 수가 없었는데, 이건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이야기가 아닌가. 기가 막히기 그지없다. 이걸 대체 믿으라고 하는 말인가?? 진석이 그 새끼가 왜? 대체 뭐가 모자라서. 게다가, 고르고 골라 하필이면 그 백동영 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라서. 아무리 바보라도 쉽게 믿을 수 없을 만큼 허튼 소리라서. 그 사실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게 받아 들여 진다는 것은 인간 심리의 아이러니인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한 대로, 아무리 바보라도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믿지 않을 것이다. 거짓말일수록 앞뒤의 사리가 맞아야 먹힌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 똑똑한 백승언이. 혹은 내 포장마차에 왔던 그 남자와 같은 인물들이 허술한 이야기 구조로 사람을 농락하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원래 진실 속에 교묘하게 거짓을 숨기지, 이런 허황된 이야기로 사람을 속이려고 들지는 않는다. 놈들은 아마도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거짓을 말하기 위한 전초로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런게 아니라면 저런 터무니없는 말을, 이렇게 공들인 연극에서 대사로 주워섬기게 할 리가 없는 것이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하지만. 이성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감정까지 납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살벌한 음성이 목을 타고 흘러나온다. 나는, 한 사람의 이름을 이렇게까지 더럽혀지는 것을 이전에 들은 적이 없었다. 살모의 원수와 살을 섞었다니. 그것도 장장 십년 동안이나? 그러면서 내게 형이라고 부르고, 그러면서 내게 웃음을 보였단 말인가? 살모사 새끼가 아닌 이상에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헛웃음을 짓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석이 그 놈은, 그렇게까지 인간이 아닌 놈은 아니었다. 약삭빠르고 이기적이어서 그렇지, 그런 식으로 남을 희롱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니다. 나는 본능처럼 진석이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시건이가 하는 말은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네 그랬군요 하고 순순히 믿어줄 만한 사안이 아닌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누가 각본을 짜주었는지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처럼 순순히 놈들이 원하는 연기를 해 줄 수가 없었다. 이것을 바래 한 말이라면 성공이겠군. 나는 끓어오르는 머릿속에서 유일하게 차가운 부분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덕분에, 나는 이성을 제대로 챙길 수가 없었다. 이렇게 화가 난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알지도 못할 만큼 나는 화가 난 상태였던 것이다. "그냥 호스트를 대정에서 대체 왜 쫓겠어? 아직도 모르겠어?? 가진 거라고는 불알 두 쪽이랑 낯짝밖에 없던 진석이가, 대체 어디서 그 많은 돈이 나서 펑펑 쓰고 살았겠어? 아줌마들한테 몸 팔아서? 하! 술집 나가고 몸 팔아서 진짜로 돈 버는 사람 본 적 있어?? 빚말고 돈 만들어서 떵떵거리면서 뒷골목 나가는 년 본 적 있냐고. 그 년들 팔자 고치는 거 첩살이 사는 것 밖에 없다는 거 몰라서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거야?" 시건이는 내 반응을 냉철하게 바라보면서 연기를 계속한다. 그의 대사를 보자니, 아마 내가 화를 내는 것도 그쪽에서 의도한 모양. 내 심리를 잘 읽었나 보군. 나는 냉소했다. 그래. 아까 너무 쉽다고 생각한 부분조차 어쩌면 네 놈들의 의도인건가. - 그러면 갈 때까지 가보자. 니들이 대체 뭘 원하길래 이런 이야기를 내게 듣게 하는 건지, 나는 알아야겠으니까 말이야. 바득. 절로 이가 갈렸다. 놈들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런 대로, 아니라면 아닌 대로. 놈들에게 갚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고작 그게 증거라서 그 따위 말을 해? 그래. 네 말대로 진석이 놈은 내 동생 같은 놈이야. 그런데 네 말 하나로 그 놈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할 것 같아? 아무리 네가 내 친구라고 하더라도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 거다 이시건." "친구는 못 믿겠고, 자기를 방패막이 삼아 던져놓고 도망간 그 새끼는 믿겠다?" "이시건!" "구체적인 증거까지 들어줘? 그래야 믿을래? 좋아. 이야기하지. 진석이가 대체 언제 사라졌어? 그것도 몰라? 백동영이 죽던 날이야. 그 새끼가 서울 뜬 건 바로 그 날이라고. 헌데 그 새끼가 그냥 사라진 줄 알아? 백동영이 갖고 있던 비밀 장부를 들고 튀었다고. 대정 하고 거래한 국회의원 명단이 지금 그 새끼 손에 있다는 거 알아? 대정이 눈에 불 켜고 그 새끼 찾는 거 봤을 거 아니야. 대정이 한가해서 아줌마들한테 몸이나 파는 호스트를 그렇게 쫓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야말로 정신 차려라 우제열. 진석이 새끼가 가린다고 장님 노릇하고 백동영 구역 아래에서 이제껏 비호 받으면서 장사한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야 할 네가 오히려 그 새끼를 감싸고돌아?" 시건이 새끼는 겉으로는 벌개진 얼굴로 열을 내고 있어도, 그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오라. 이거였구나. 나는 직감했다. 이 말은 확실하게 사실이었다. 100%는 아니라도 대부분은 사실이다. 진석은 지금 비밀 장부를 갖고 사라진 거였다. 그래서 놈들이 진석을 이렇게나 찾는 것이다. …어쩌면, 시건은 진석이 비밀 장부를 갖고 사라진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내 주위에 있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태규도 아니고 꼭 시건이었다. 우연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면, 연결 관계는 그런 것뿐이다. 그래.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들이 이렇게 복잡한 방법으로까지 진석이 있는 곳을 찾아내려는 이유를 말이다. 또한 원치 않게도. 나는 다른 것까지 깨달을 수가 있었다. 진석이 백동영의 정보를 백승언에게 빼돌릴 수 있었던 것은 진석의 특수한 위치 때문이었을 것일 거라는, 기가 막힌 진실을 말이다. 주먹을 쓰긴 하지만 프로까지의 솜씨는 못되고, 머리가 좋긴 하지만 잔혹하지 못한 진석이 대체 어떻게 백동영이 가진 계열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는지 그것을 이제야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너 이 자식. 대체 무슨 생각으로-.' 뇌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냉정하게. 가능하면 이성적으로 사태를 파악해보려고 하고 있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진석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해. 나도 가만히 있는데 어째서 네가. 그런 것은 아무도 바라지 않았는데. 내 어머니조차도 우리들이 행복한 보통 사람으로 사는 걸 바랬지 복수 따위를 바란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그렇게 험한 꼴을 당해 피 토하고 죽어가면서도, 너희들 잘 살아라 그러셨지 내 복수 해달라는 말 따윈 한 적이 없었다. 그 분은 당부하신 것은 오히려 다른 것이다. 그 분은 계란으로 바위를 던지는 것 같은 일에 우리의 일생이 말려들지 않게 하라 하셨었다. 네가, 이제까지 저지른 것과 같은 바로 그러한 일만은, 제발 말아 달라고. 그랬는데 어째서 네가 그랬는가. 내 어머니의 임종을 지킨 나를 제외한 단 하나의 사람이 바로 너였으면서. 말도 못하게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서글프고, 기가 막히고, 찢어질 것처럼 가슴이 메여 온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마음을 채우는 것은 맹렬한 분노였다.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을 만큼의 강한 적의. 내게 이제껏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런 짓들을 벌여 온 놈에게 나는 미친듯한 분노를 느꼈다. 또한 복수에 눈이 먼 어린 사내애를 안은 백동영이, 부관참시를 하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녀석을 이용하려고 했을지도 모르는 시건이 새끼에게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놈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게 이 말을 전하면서도 눈빛이 변하지 않는 것은, 내가 화를 내는 표정을 보고 착찹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하는 것은. 놈이 이미 오래 전부터 진석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놈은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내게 이야기 해주지 않았었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백동영보다도, 써먹을 대로 써먹고 버리기 위해 녀석에 굳이 감춰온 비밀을 내게 전한 대정의 백승언보다도, 더 증오스러운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눈 앞에 있는 저 이시건이다. -놈들이 의도한 바가 바로 이 거라면. 나는 차갑게 웃으면서 생각했다. 놈들은 나를 아주 제대로 본 셈이었다. **** 늦었습니다. ^^;;; 오늘 약속이 있는데 늦잠을 잤어요;; 약속 시간에 늦을라 헐레벌떡 뛰어가느라 소설 올리는 것을 잊었습니다. 도착하고 나서야 아차 했죠. 약속에서 돌아와서 퇴고하고 바로 올립니다. (라고 해도 자정으로부터 딱 삼십분 남았습니다;) 기다리신 분들에게 송구합니다. (ㅜㅜ)(__) 가장 완벽한 아침 10 주먹을 쥐었다 폈다. 맨손으로 사람을 때린 타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손마디가 맵고 쓰리다. 나는 시건의 이빨에 닿아서 까진 듯 한 손등의 자국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마디마다 벌겋게 드러난 속살이 매우 쓰라렸다. 벗겨진 상처에서 손등으로 길게 이어 내려진 핏자국을 보고 있자니 내 주먹을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눈을 돌리지 않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던 시건이가 생각났다. 뭐가 그렇게 당당했던 것일까? 놈의 눈은 마치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놈을 미친 듯이 때리면서도 기분이 풀리지 않고 더욱 더러워지기만 했던 것은 놈의 그 똑바른 눈 때문이었다. 나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화내지 않는 그 눈.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는 듯, 뻔뻔스러울 정도로 단호했던 그 눈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으니, 타인의 인생 또한 그것으로 망가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인가.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쓴 물을 삼키면서 생각했다. 수단도, 방법도. 인간이 인간으로써 지켜야 할 존엄성도 다 무시한 채. 그렇게 받은 만큼의 것을 그대로 되돌려 주어야만 직성이 풀리냐 이시건. 나는, 그 앞에서는 차마 물어보지 못한 바를 뒤늦은 이제야 되물었다. 백승지가 시은에게 했던 것을 그대로 갚아준 우리처럼. 백승지가 당한 것의 배로 우리의 행위를 되갚은 백동영처럼. -그리고 그 백동영을 몸을 버려가면서까지 다시 해친 진석이처럼. 하지만 그러고서도 일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러지 않은 만 못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시건이는 자신이 평생 적으로 알던 놈들에게 잡혀 있었다. 진석이는 그 일을 벌인 덕에 생사를 점치지 못하는 도피행로 속에 있다. 지난 세월 동안 스스로가 가꾸어 왔던 인생 모두가 뒤집혀진 채.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앞으로의 인생을 정상적인 것으로 되돌릴 최소한의 가능성 마저 잃은 채. 한없이 되풀이되는 순환 사슬이었다. 한없이 되풀이되는 복수. 이제야 비로소 내 어머니가 나를 그렇게 목숨을 걸고 뜯어말린 이유를 알았다. 배운 것은 없지만 누구보다도 힘든 삶을 살면서 세상사는 법을 깨친 사람이 바로 내 어머니였다. 현명하진 않지만, 지혜롭진 않지만, 그야말로 정이 많던 우리 어머니는 덕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눈에 피가 피를 부르는 복수가 어떻게 보였을지 나는 이제야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우습지만 그것은 진실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상처가 가장 아픈 법이었다. 어떤 사람이건 자신이 당한 일이 가장 억울하고 가슴 아픈 법이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내가 상처를 입히는 상대도 또한 그런 식으로 밖에 생각할 줄을 모르는 같은 인간인 것이다. 애초에 누가 시작했느냐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젠. 그것이 한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놈들은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그 놈들은 복수라는 빌미를 명분 삼아 자신의 인생을 망칠 권리가 없었다. 시건에게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제 오라비를 걱정하는 시은이가 있었다. 진석이에게는 내가 있다. 나나 시은이나, 그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들이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사는 거지, 내가 받은 만큼의 것을 돌려주는 복수의 대행이 아니다. "………진석이 너 이 새끼." 진석이를 생각하니 다시 미칠 것처럼 가슴이 아려왔다. 어째서 이제껏 그것을 몰랐던 것일까. 나는 놈이 한 짓만큼이나 나의 무심함이 가슴 아팠다. 진석이가 몸 파는 놈 소리를 그렇게 듣기 싫어하면서도, 호스트 노릇을 줄곧 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나였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던 어린놈이 느닷없이 생긴 재산을 굴리고 있을 때도 뭔가 특별한 비결이 있는가보구나 했지 다른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진석의 일을 따지자면 그랬다. 시건의 말이 어쩌면 맞는 건지도 모르는 것이다. 눈치채지 못한 쪽이 잘못이다. 진석이에게 조금만이라도 더 신경을 썼더라면 알 수 있을지도 몰랐는데. 동생이라고, 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그 녀석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건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했었으면 지금처럼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수진이가 진석이가 불쌍하다고 했을 때 나는 웃었다. 애들이 진석이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것을 그저 농담으로만 듣고 있었다. 민희가 진석의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고 말했을 때, 나는 내가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대수롭지도 않게 넘겼다. 놈이 내게 마지막으로 전화했을 때, 나는 그 숨소리에 섞여서 들리던 거친 샛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듣고 넘겼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모든 이야기들을 그냥 넘어간 것일까.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며 나는 생각했다. 그 놈이 그저 남자에게 몸을 팔았다고만 한다면, 그래도 이렇게까지 미칠 것 같지는 않을 것이었다. 여자에게 파는 것과 남자에게 파는 것이 뭐가 다르겠는가. 정조 팔아서 먹고사는 인생이란 어차피 그렇고 그런 것인데. 또한, 그 놈이 호모라서 사내와만 되는 놈이라서 그랬다면 이해하기는 힘들었어도 받아들이기는 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런 거였다면 처음에야 당황하고, 화를 내고, 두드려 패는 한이 있었어도 결국은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남자랑만 되는 놈들은 천성이 그런 것이었다. 감옥 같은 특수한 상황이라 사내가 아니면 욕정을 풀 데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멀쩡하게 사회에 있는데다가 인물이 그 인물이었다. 여자들이 좋다고 줄줄 따른다는 것을 내가 아는데 여자가 모자라서 그랬다고 할 것인가? 그런 그놈이 굳이 남자랑 몸을 섞었다면 지가 좋아서 한 짓일 터였다. 제가 좋다고 하면 나야 어쩔 수가 없는 거다. 제가 그런 것만 된다고 한다면, 그거야 녀석의 일부려니 하고 받아 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그런 게 아니었다. 정말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싫은 상대에게 십년 가까이나 몸을 내어 준 것이다. 좋아서 다리를 벌린 게 아니고, 목적이 있어서 벌린 거다. 그 자식은 몸만 판 게 아니라 자기 정신까지도 판 거였다. 나는 그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 내 앞에서 웃고 떠들던 놈이 속으로 그렇게 혼자 곪았다는 사실, 바로 그것 때문에. 누가 그런 짓을 하랬어. 나는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동공에 녀석의 얼굴이 맺혔다. 생시인 듯 선연한 그 표정. 그 얼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듯 얄밉게 딴청을 피는 그 얼굴이 기가 막히게 안타까우면서도 미웠다. 나는 내 눈에만 보이는 진석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누가 널더러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래. 왜 그런 허무한 일에 인생을 바친 거냐 너는. 네 인생을. 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할 이십대를, 어째서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에 버린 거냐 너는. 소리도 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자신의 손등의 상처를 쳐다보던 나는, 손등보다 더 깊은 곳의 속살에까지 와 닿는 생채기에 깊은 고통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가엾고, 애처롭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미워서.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원망스러워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내가 나섰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진작에 시건의 손을 잡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진석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텐데. 상처받은 손으로 상처받은 얼굴을 감쌌다.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도 부끄러운 것은, 우제열이라는 인간 그 자체였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지독하게 눈치 없고 생각 없는 남자에 대한 부끄러움. 흐느낌이 억누른 목을 비집고 나왔다. 그렇게, 나는 울었다. 지하철 안의 분위기는 썰렁했다. 한참을 울다 지쳐 소매로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을 때 앉아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서 있는 사람들조차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 시선을 피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같이 덩치 큰 남자가 지하철에서 소리도 내지 않고 흐느끼고 있으니 당황스럽기도 했겠지. 흉하게 보이기도 했을 것이고. 너무 울어 띵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생각의 내용이 마음에까지 와 닿지는 않는 듯 했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야 마땅할 상황인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손발까지 감각이 없어진 것 같다. 흘러내린 눈물이 보호막이 되어 주위를 감싸기라도 한 양. 소음도 시선도 느껴지지 않은 투명한 막 뒤에 앉은 느낌으로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감정이 격해져서 울음이 나왔다.' 이 말을 이렇게 실감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 거였다. 처음으로 이렇게 참을 수 없는 느낌으로 오열을 했다.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내게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사내는 일생에 세 번 밖에 안 운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너는 어쩜 그렇게도 안 우니? 너는 나중에 이 엄마가 죽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거다 아마. 그것은 동네 애들을 패고 들어온 걸 야단치느라 매를 들었던 어머니가, 잘못했다고 빌기는커녕 오히려 씩씩거리면서 자신을 노려보는 앙칼진 아들을 보고 기막혀 하시며 중얼거리시던 말씀이셨다. 유달리도 눈물이 많던 그녀는 자신의 배에서 어떻게 저렇게 독한 놈이 나왔는지 궁금한 듯 매를 때리고 나면 곧잘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었던 것이다. 성격 못 된 아들이 그 말에 눈물을 더 참아 내는 건 줄은 모르고. 그래도 사내라고, 어미가 한탄하는 말을 칭찬인 줄 알아듣고 우쭐해서 일부러 더 안 우는 아들을 향해 그런 한탄 아닌 한탄을 하시곤 했던 것이다. 아비가 없어서 일까. 주위에 폭력적인 사내만 있었기 때문일까. 사내들의 못된 성미만 차곡차곡 배우며 자란 나는 어머니에게 참 불효한 자식이었다. 동네 애들 다 치고 다니던 골목대장에서부터, 주먹 꽤나 쓴다는 건달패로 자랐으니까 말이다. 어려서 그런 기억이 있어서였을까. 뒷골목 건달패로 있던 젊은 시절. 어머니가 날 야단칠 때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면 푸하하 웃으면서 그래. 나는 그럴만한 놈이다. 어머니가 돌아 가신들 눈물 흘리겠냐. 이 우제열이가 라며, 참으로 터무니없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었던 것도 같다. 부끄럽지만 젊고 생각 없는 사내의 감성이란 그런 것이었다. 불효자는 우는 법이라는 것을 그때만해도 까맣게 몰랐다. 정작 어미가 숨을 놓았을 때 세상이 다 끝난 듯 아득하게 몰려오는 절망감을 그때는 미처 예상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소중한 사람을 울리는 일이다. 젊었던 나는 그걸 몰랐다. 알게 된 것은 정말 울리지 않아야 할 분을 떠나 보내고 나서다. 그분이 평생을 흘렸던 눈물의 무게를 가슴에 담게 되면서 부터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후회는 때늦었다. '이런 생각은 오랜만에 하는군.'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감정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닌데, 너무 감상적이 된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마냥 슬퍼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뒤늦은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일이 나기 전에 진석이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지키지 못한 후회는 이미 알고 있으니, 두 번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야 옳은 거였다. 지난 십 년 간 가슴에 묻어두었던 일들이 다시금 되살아나 마음을 어지럽힌다고 해도 감정에 져서는 안 된다. 허나 그렇게 마음을 다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감정은 더 산란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애써 추억하지 않으려 했던 기억들이 잠긴 빗장을 멋대로 열고 나와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들을 했던가. 나는 그 시절 내가 시작한 일을 이제와서야 후회했다. 그 얼마나 생각이 없었던가. 나는, 세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몰랐던 그 시절의 젊은 나에게 거의 적의마저 품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겨우 스물 넷의 나이었던, 정확히 따지자면 십 일년 전의 나는 홍콩 느와르 따위에 심취해있던 뒷골목 양아치였다. 힘들게 일하시며 생계를 꾸리시는 어머니의 일을 돕기는커녕, 그 나이가 되도록 빈둥거리면서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것만 즐겨하던 생건달이 그 시절의 나다. 주먹에 자신이 있었기에 이런 저런 파에서 물어다 주는 용역이나 처리하고. 그러면서도 어떤 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조그마한 이름이나마 날리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실력이 있으니까 이렇게 노는 거지. 힘이 없었으면 겨우 넷의 인원으로 이렇게 뒷골목을 활개치고 다니지는 못한다고 자랑스럽게 웃던 젊은 내가 생각났다. 그 시절의 나는. 아니, 우리는. 어떤 일에 있어도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 사내다움을 몹시 동경했었다. 홍콩 느와르에 열광하고, 아닌 척 하면서도 괜히 이쑤시개 하나를 입에 물어보던 그 시절. 프로페셔널하게 일을 처리하고, 세상을 시니컬하게 바라보며 멋지게 살다가도, 오로지 우정 하나에는 눈이 머는 열혈의 사나이로 사는 것이 나의 몫이라고 여겼었다. 현실이 영화 같지 않다는 사실을 그때의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아니. 우리는 그토록 열광하던 영화를 제대로 보지도 않은 불성실한 관객이었다. 시은이가 당한 일에 같이 열을 내며 자신들이 무슨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듯 사적 복수를 행한 우리는, 그 느와르 영화의 결말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웅본색. 우리가 감동하며 봤던 그 영화에서는 결국 주인공들은 다 죽었었다. 현실은 그보다 한층 더 잔혹해서, 우리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족들이며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는 것까지 봐야 했었다. 그토록 우쭐대던 실력은 자신의 몸 하나 지키는 것이 고작일 뿐인 초라한 수준의 것이었다. 우리는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정말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었다. 우습게도, 스스로의 미력함이 어느 정도인지 알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시건이네 집안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도 그때서야 간신히 알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창피한 노릇이었지만, 차라리 우리가 그때 나서지 않았었더라면 시은이의 일은 훨씬 원만하게 해결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백승지는 사지절단은 아니더라도 한국 땅을 두 번 다시 밟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며, 그 순간의 타협으로 다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가 겁 없이 나선 것은 오히려 일을 꼬아 놓는 것 밖에 되지가 않았다. 물론 시은이네가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다면 이런 가정은 소용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시은이가 평범한 가정의 딸이었으면 백동영이 그 애에게 사과를 했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힘조차도 제대로 몰랐다는 점이었다. 자기에게 손이 달렸는지 발이 달렸는지도 모르는 아둔패기 주제에 감히 상대할 수도 없는 존재를 건드린 것. 복수를 한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복수를 한답시고 무작정 휘둘렀던 손이 문제였다. 우리는 머리가 나빠도 너무 나빴던 것이다. 뒤처리 따위는 생각조차 않은 우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락없는 날건달에 불과한 놈들이었던 것이다. 법은 주먹보다 멀었지만, 권력은 그 주먹을 자기 수족으로 부리는 힘이었다. 사람이 휘두를 수 있는 힘은 사지에 붙은 게 전부가 아니다. 백승지 그 자식은 혼자 힘으로는 여자애나 두드려 팰 능력밖에 없었지만, 놈이 그렇게 잔혹해 질 수 있었던 것도 그 손에 다른 종류의 힘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힘. 그 권력. 그들이 무소불위로 휘두르던 그 검은 힘. 그 힘에 휘둘린 것이 참을 수 없었던 시건은 스스로가 그 힘이 되려고 했었다. 그 힘에 짓밟힌 다른 놈들은 가능하면 몸을 움츠리며 소시민으로 남았다. 겁먹고 고개를 외로 돌려버린 다른 놈들에 비해 그나마 피해를 덜 받은 나는, 그 힘이 얼마나 혐오스러운지를 맨 정신으로 똑똑히 지켜 본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그들의 힘은 힘 그 자체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상 따윈 없을뿐더러, 의리 같이 낭만적인 단어조차도 손익에 유리할 때만 발휘되는 것뿐이었다. 추악한 자존심과 삐뚤어진 과시욕. 철없던 우리들이 열광하던 홍콩 느와르는 그릇된 이상향일 뿐이었다. 프란시스 코폴라의 대부는 존재한 적이 없는 환타지의 산물이다. 나는 시건이처럼 그 힘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또한 그 힘에 짓눌려 겁먹으면서 살고 싶지도 않았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관심이 없어진 것도 그때쯤이었다. 내 계급에서, 소위 말하는 '잘사는'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해야 하는 짓들을 도저히 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실을 깨달은 나는, 그때까지 내가 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나는 고졸이었고, 폭력전과가 있었으며, 사생아였다. 내 어머니는 창녀였다. 내 어머니가 가졌던 얼마 안 되는 돈은 내 사지가 내 몸에 멀쩡하게 붙어 있는 댓가로 사라지고 말았다. 병들고 지친 늙은 어머니는 포장마차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내가 빵에서 나왔을 때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것은 닷 평짜리 달동네 월세방 하나와 포장마차 한대가 전부였다. 기술조차 없었던 나는 취직도 되지가 않았다. 이런 내가 잘 살 수 있는 길은 '그들'처럼 되는 것뿐이었다. 솔직히 유혹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젊었던 나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고, 피부에 와 닿는 삶은 지나치게 고단했다. 시건이 뿐만이 아니라 그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는 하지 않았던 친구들 중 그쪽 계열로 나간 놈들은 심심찮게 나를 찾았다. 네가 내 곁에 있으면 든든할 거다. 시건은 내게 손을 내밀면서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 손을 마주 잡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그 얼굴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너 정도면 금방 간부급이라고, 그러면 고생만 하는 어머니 병원에도 모시고 갈 수 있고 호강도 시켜 드릴 수 있지 않겠냐고. 어머니가 장봐온 찬거리를 다듬는 나를 유혹하는 놈들도 있었다. 번쩍거리는 외제 승용차를 타고 검은 양복을 빼 입은 놈들 앞에서 파를 다듬고 있는 모습이 잠시나마 부끄러웠던 것은 단지 내가 젊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싫었다. 내가 가장 혐오하던 모습에 동화되어 가야 한다는 사실이 참을 수가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리고 걱정했던 것도 주요한 원인이긴 했지만, 가장 큰 원인은 더 이상 내가 그쪽에 대한 환상을 가질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굴복 당한 기분을 알았다. 그 누구도 정당화 할 수 없는 더러운 힘으로 강제로 짓눌린 기분을 모르는 내가 아니었다. 두 눈 멀쩡히 뜨고 강간당한 것 같은 그런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나였다. 그런 주제에 타인에게 자신이 받은 것과 같은 것을 돌려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 자신이 그런 힘의 수족이 되어 나와 같은 희생자들을 만들어 내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랬기에 나는 녀석들의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나름대로는 호의였을 그 손들을 매정하리만큼 차디차게 뿌리친 것은 놈들과 같이 시궁창에서 뒹굴고 싶지 않다는 나의 작은 오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오로지 내가 번 돈 만을 가지고 살았다. 내가 일해서 번 걸로 내 입을 먹였다. 그것으로 인간으로 태어난 도리는 다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고 싶지가 않았다. 더 이상 대수롭지 않은 듯 타인을 폭력으로 굴복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걸어오는 시비는 참지 않았지만, 내가 시비를 거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나 자신에게 납득하면서 사는 삶은 만족스러웠다. 문득 문득. 이렇게 허비하듯 인생이 지나가는 것을 두고 봐야 하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선택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하지는 않았던 상태였다. 푼돈이나마 통장에는 돈이 모였다. 분식집을 하면 좋을까. 그렇지 않으면 자그마한 슈퍼를 할까. 못 먹고 자라서인지 먹는 장사가 유달리도 하고 싶었던 나는 돈이 모이면 남들처럼 작은 가게라도 얻을 생각이었다. 통닭집을 하든지, 정육점을 하든지. 적금 만기가 올 때마다 그런 고민에 가슴이 떨렸다. 조금만 더 모아보자. 조금만 더. 학교 앞 분식집이 통닭집이 되고, 통닭집이 정육점이 되고. 알을 까서 농장을 사는 꿈을 꾸는 것처럼 품안에서 키우는 돈이 커갈 때마다 꿈도 커져만 갔다. 가끔씩 집에 찾아올 진석이에게 팔아야 할 고기근을 들려주고 흐뭇해하는 상상도 했었다. 그때쯤이면 진석이도 그 처절한 생활력을 보충해 줄 부인 정도는 얻었을 테니까, 내가 쥐어준 고깃근이 처참한 지경이 되지는 않을 것이리라 나는 생각했었다. - 내가 꿈꾸던 삶은 그런 것이었다. 내가 꿈꾸던 미래란 그런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태평하게 지내는 동안, 내가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시궁창에 진석이는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진석이 빠져 있던 것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차라리 더 깊고 더러운 늪이었다. 나는 내 대신으로 그 녀석을 그 늪으로 밀어 넣은 것 같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자책하고 말았다. 내가 디디는 땅을 단단히 하고저, 그 애를 내 대신 희생양으로 삼은 것만 같다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바보같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 생활을 살아가면서도 불구하고 가끔씩은 복수를 꿈꾸는 작은 일탈을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도 사람이라서. 나도 인간이라서. 내가 당한 일이 억울하고 분해서 백동영에 대해 분기를 불태워왔었다. 그쪽으로 발 디디기는 싫다면서, 놈이 어떻게든 댓가를 받는 꼴이 보고 싶다는 이율배반적인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 모든 모습을 곁에서 고스란히 지켜보던 사람이 바로 진석이었다. 녀석은 십 년을 백동영의 옆에서 보냈다. 그 긴긴 세월을 어떻게 내도록 복수심에 차 있었을 텐가. 중간에 지치기도 할 테고, 회의가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일을 당한 당사자도 아닌 놈이 그렇게 오래 독기를 벼러왔던 것은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서였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내가 생각 없이 내뱉은 한숨이 녀석의 등을 떠밀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무심코 한 한탄이 녀석의 가슴에 박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녀석이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디딤돌을 내가 만들어 줬던 건지도 몰랐다. 점 점 더 깊은 곳으로 가기만 할 뿐인 넓은 늪 속으로. 간신히 발을 적시지 않을 만큼의 디딤돌을 내가 제공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녀석의 발 밑의 디딤돌은 사라졌다. 녀석이 딛고 있던 것은 모조리 허상이었으니 이제야 사라진 것은 오히려 늦된 것이었다. 놈은 가장자리로 헤엄쳐 나오지도 못하고 그대로 잠겨 버렸다. 지금에야 놈이 그런 위험한 길로 나갔다는 것을 알아 챈 내 눈앞에서, 놈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응?' 우울한 생각으로 머리를 적시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런데 그 손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뭔가가 잡혔다. 처음에는 그것도 눈치 못 채고 멍하니 손가락 끝으로 종이를 문지르고 있던 나는, 한참 후에야 그것이 시건이 전해준 종이쪽지라는 것을 깨닫고 혀를 차고 말았다. 놈들에게 잡혀 있는 시건이 새끼를 죽도록 패고 뛰쳐나온 것도 모자라, 녀석이 목숨을 걸고 전해준 것이나 다름없는 종이쪽지까지 까먹었다니. 시건이 새끼가 아무리 죽이고 싶도록 미워도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십 오년지기 친구를 죽으라고 내버려둘 수가 없었던 나는 손안에 잡힌 종이쪽지를 살며시 쥐었다. 찬물을 뒤집어 쓴 듯, 흥분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상황을 찬찬히 되집어 보기 시작했다. 놈들의 꼭두각시놀음에 놀아나는 것은 시건이 새끼 하나로 충분한 노릇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 놈들에게 내게 소중한 사람을 잃을 마음이 없었다. '날 불러내서 굳이 진석의 지난 사정을 이야기 해 준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함정으로 몰아 넣을 수 있었던 자리에서 순순히 나를 내보내준 것은?' 머릿속을 차갑게 비웠다. 흥분에 들떴던 기분을 모조리 몰아내고 눈앞에 닥친 일에 생각을 집중했다. 첫 번째의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첫 번째의 답도 자문 자답처럼 연이어 떠오른다. 사실 이건 쉬운 문제였다. 내가 조금만 더 냉정했다면 진작에 알아챘을만한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놈들은 내가 진석이와 연락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모든 사실을 안다면 진석에게 달려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를 불렀고, 또 나를 풀어준 것이리라. 그랬다면, 분명히 모텔에서부터 미행이 붙었을 터였다. 지하철을 꽉 채운 이 많은 사람 들 중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줄곧 지켜본 놈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후우. 한숨을 내쉰 나는 부운 눈두덩을 손등으로 비볐다. 정말로 그랬다면 그 미행자는 참 좋은 꼴을 본 셈이었다. 나같이 험악한 덩치의 남자가 지하철에서 숨죽여 우는 꼴을 몇 십분 동안이나 보았으니. 저 새끼 뭐 저런 게 다 있냐고 욕이나 한바가지 하고 있겠지. 역에서 내리면 화장실부터 가야겠구나. 나는 싸늘하게 식은 것 같은 머릿속에서 첫 번째 할 일을 떠올렸다. 열이 올라 벌건 얼굴부터 씻고, 종이가 대체 무슨 이야기가 적혀 있는지 확인을 해봐야 할 성 싶었다. 시건이 놈이 그런 상황에서 전해 준 것이니 틀림없이 중요한 정보가 있을 터였다. 어쩌면, 진석의 행방을 알게 되는 열쇠가 될 지도 모르고 말이다. 결국 놈은 나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진석이까지 얽혀 있는 한. 게다가 십 오년짜리 친구가 그 꼴을 하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보기까지 했는데. 내가 어떻게 행동을 하지 않고 있겠는가 말이다. 혹시나 이건 대정이 아니라 시건이 놈의 함정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너무 완벽했다. 그 새끼 잔머리는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유명한 게 아니었던가. 게다가 시건이 놈은 사람 부리는 요령을 타고 난 놈이었다. 우리 패거리에서 리더라고 하면 나였지만, 실질적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시건이 놈의 일이었던 것이다. 정보통인 지네 집안 어른들 눈을 다 가리면서 그 정도까지 세력을 키운 걸로 봐서도 그렇고, 진석이 꼬셔서 이중 스파이를 시킨 걸 봐서도 그렇다. '이번에 살아나오면 너 이놈의 새끼, 정말 내 손에 단단히 맞을 줄 알아라.' 진석이 생각을 하니까 다시 열이 채인다. 죽이는 한이 있어도 내 손으로 죽여야지, 그 새끼들 손에서 유명을 달리하는 꼴은 못 보겠다. 아무리 미워도 일단 살려는 놓고 보자. 그 새끼 쳐죽이는 것은 그 다음에 할 일이다 … 이런 이율배반 적인 생각이 드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시건이 놈이 한 짓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였다. 놈은 정말로 해서 안 되는 일을 해버린 것이다. 놈이 나를 친구라고 생각했다면, 절대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까놓고 이야기 해보자. 나는 다시 치밀어 오르는 독기를 느끼며 이를 갈았다. 유세할 생각이야 없다만, 그래도 나는 지 동생 복수해주겠다고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이 꼴이 된 거였다. 그런데 제 놈은 이게 뭔가? 남의 동생이 그 지경으로 되어 있는 걸보고 모른 체 한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제 복수를 위해 이용해 먹기까지 해?? 애가 몸 팔아서 얻는 정보를 희희낙락 받아 챙기셨어? 네 복수가 그렇게 중요해서?? 걔가 무슨 마타하리냐. 거기가 어디라고 애한테 이중스파이를 시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백승지에게 해 준 만큼만 해주지. 나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게 가장 합당한 것 같았다. 시건이 놈은, 나한테 그렇게 당해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가장 완벽한 아침 11 인간의 기억이란 놀라운 데가 있다. 맘먹고 되 집으면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것들까지도 다시 새기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길눈이 밝은 편이 못 되는 내가 단 한번, 그것도 남의 차에 실려 간 장소를 정확하게 되짚어 가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인간이란 맘먹으면 못할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평소에 다니던 길도 아니었고, 제법 넓은 주택지라 돌아가는 골목마다 엇비슷해 보이는 판국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더듬더듬 나아가다가 제법 특색이 있었던 장소에 도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더듬 더듬 나아가는 과정이긴 할지 언정 길은 틀리지가 않았던 것이다. 놈들을 떼 놓느라 시간이 꽤 걸린 탓에 - 그것도 확인을 하기 위해서 괜히 서울 시내 반바퀴를 빙 돌기까지 했다. - 때가 뉘역 뉘역한 저녁 무렵에 이 동네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또한 한 몫을 했다. 저번에 시건이 놈과 함께 갔을 때와 거의 비슷한 분위기여서 내 어두운 눈으로도 길을 찾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강화도 횟집'이라고 씌여진, 주택가에 있기에는 다소 화려한 간판을 한 횟집을 마주보고 있는 나홀로 빌라를 올려다보았다. 어스름하게 내려앉은 어둠사이로 페인트가 낡아 벗겨진 빌라는 제법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몇 집은 불이 켜져 있었고, 밥을 짓는 모양인 듯 갖가지 음식 냄새가 골목을 맴돌고 있었다. 여기가 놈들이 '강화도'라는 암호명으로 부른 장소인가 보았다. 그 작전명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너무 뻔한 일이라 헛웃음이 났다. 이런 일대사를 벌이면서도 장난칠 기력이 남았었다니 시건이 놈이나 진석이 놈이나 둘 다 어지간한 놈들이었다. "하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있는 것은 속에서 들끓는 감정을 삭히기 위해서였다. 막상 도착을 하고 보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를 만큼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지난 십년 동안. 물처럼 고요하기만 했던 감정들이 모처럼 기세를 내며 마음껏 발버둥치고 있었다. 덕분이 아니라 때문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 영향 때문에, 나는 괴로웠다. 덮어두고 있던 힘든 기억이 모조리 되살아 난 것만으로도 모자라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말았으니까. 이 녀석과 얼굴을 마주 대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고민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올려다 본 아파트에는 분명 불이 켜져 있었다. 그저 켜진 불이 아니라 안에서 인기척이 나고 있다는 사실은, 밖에서 보기만 해도 알만한 일이었다. 이런 동네에서 일상적인 생활 패턴에 어긋나게 늘상 불이 꺼져 있는 것도 이상한 판국일테니, 말이 나지 않게 하려면 때 되면 불을 켜고 때 지나면 불을 끄는 것이 오히려 적절한 일일 것이다. 예로부터 나무는 숲에 숨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심호흡을 하고 빌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화반점이며 통닭집 같은 광고 스티커들이 덕지덕지 붙은 철문에는 어울리지도 않게 비밀번호를 눌러 열게 되어 있는 전자식의 키가 달려 있었다. 시건이네 집처럼 지문 인식입네 어쩝네 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비밀번호를 입력하게 되어 있는 그 장치는 철물점에서 파는 삼천원짜리 자물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집을 지킬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나에게는 좀 과하게 생각되는 물건이었다. 미간을 좁히면서 나는 이 열쇠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였던가를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신기해하는 나한테 어쩐 일로 제법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던 시건이 놈의 음흉한 속셈을 다시 깨달으면서. 하지만 그 놈은 정말 나쁜 놈임에 틀림없었다. 나도 이제는 삼십대 중반이다. 기억력 테스트를 시키는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술 담배에 찌든 늙은 육신에게 뇌세포를 필사적으로 뒤적이게 만드는 것은 확실히 도에 어긋난 수작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머리 굴리는 일이라곤 전혀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해본 적이 없는 나다. 이제와 추리물의 주인공 흉내를 내기엔 뇌가 너무 뻑뻑하단 말이다. 게다가 본래부터 내가 좋아했던 것은 느와르물이지 추리물이 아니었다. 장르가 틀린 것이다. 그러니까 #자를 누르고 비밀번호를....에? 에러? 어째서? 나는 삐익-거리는, 꼭 발에 밟힌 병아리가 내는 단발마의 비명 같은 소음에 진절머리를 치며 키에서 손을 뗐다. 내가 뭘 잘못했나 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즉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콜롬보 형사나 제시카라는 할머니가 했던 논리적이고 아귀가 맞는 추리 대신에 형편없이 허접한 추측들의 나열이었을지언정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고였다. '분명히 놈이 내 생일이 비밀번호라고 이야기했는데? 혹시나 진석이가 비밀번호를 바꿨나?' 그렇게 생각해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절래 흔들고 말았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 곳은 진석이와 시건이 놈의 접선장소고, 이 장소를 마련한 것은 엄연히 시건이었다. 시건이 진석과 합류를 못한 상황에서 진석이가 이곳의 비번을 마음대로 바꿨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는 것은 역시 내가 잘못한 거라는 것이었다. 뭔가 작동순서가 틀린 모양이었다. 망할 녀석. 썩을 놈. 한 대 가지고 될 줄 알아? 진석이를 손봐주고 나서 네 놈도 손봐주마. 그 똑부러지게 깔끔 단정한 얼굴을 아주 떡이 되게 만들어 주고 말 테다. 빌어먹을. 나는 불만의 말을 중얼거리면서 다시금 머리를 쥐어짰다. 길을 찾을 때만큼 절박하지가 않아서인지, 그렇지 않으면 메모리가 다 한 것인지. 분명히 본 기억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순서가 분명하게 마음에 새겨져 있지가 않았다. 기계음하고 친할 까닭이 없으므로 빽거리는 소음이 날 때마다 괜시리 가슴이 덜컥한 나는 꼭 자물쇠도 제대로 못 따 쩔쩔 매는 초보 도둑이 된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해보자. 나는 시건이 놈이 내 생일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 놈 또한 내 머리를 알 테니 비밀번호를 길게 만들지는 않았을 터. 혹시나 생년월일이 아니라 생일만으로 번호를 구성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럼 다시. 어. 또? 어째서? ........우물 정자가 아니라 별표(*)였었나? 어. 또 에러? 역시 비밀번호를 바꿨......아. 생년월일이 아니라 생일이랬지. 무의식중에 또 생년월일을 눌렀구만. ....그냥 보통 자물쇠였으면 핀 하나로 따고 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고생인 걸까. 누구 좋으라고 이런 전자식 키를 설치한 거야 그 놈은. 나는 전자식 키의 빽빽거리는 비명을 들으면서, 덩달아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들고 말았다. 옆집에 사람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한 노릇이지, 만에 하나라도 있었으면 수상한 소음에 나와보고는 당장 신고를 했었을 게 아닌가. 그렇게 한참을 고생하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빠지는 순간 나는 방금 내가 들은 것이 무엇인지 모를만큼 열이 받아 있는 상태였다. 차라리 문 자체를 뜯어버릴까 이를 악 물었을 정도니까. 하지만 문은 열렸다. 어떻게든 열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은 열렸지만 그렇게 밖에서 삑삑거리는 데도 불구하고 안에서 인기척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나는 놈이 집 안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놈이 이 소리조차 못 들을 정도로 아플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가장 걱정되는 것은 첫 번째 상황이었다. 진석이 놈이 시건이가 잡힌 것을 눈치채고 다른 곳으로 달아나 버렸다면 솔직히 잡을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녀석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단서마저 사라지고 난다면 나는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야 한다. 그것도 내 뒤를 밟을 것이 분명한 놈들을 하나 하나 떨궈가면서 말이다. 나는 간첩 훈련 같은 걸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짓은 도무지 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두 번째 상황이어라. 나는 그렇게 걱정하던 놈이 어디 한 군데라도 부러졌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문을 열었다. 빌어먹게도 집안은 고요했다. 창문을 올려다보며 인기척을 느낀 것이 내 착각이라도 된다는 듯이. 지극히 평범하게만 보이는 가구들로 채워진 조그마한 거실과 각각의 문들이 굳게 닫힌 방문이 눈에 들어왔다. 보일러가 돌고 있긴 했지만 몸을 덥힐 정도는 아닌 듯. 바깥보다 조금 온화한 기운 정도만을 품은 공기가 뺨에 와 닿았다. 나는 구두를 벗고 거실로 올라섰다. 그리고 안방의 닫힌 방문을 향해 한 걸음 내딛- 살기(殺氣)?? 나는 철컥하는 공이 소리와 함께 차가운 쇠붙이가 관자놀이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한없이 낯선 감촉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차하면 내 머리를 날려버리겠다는 듯이 관자놀이에 달라붙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까끌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손들어." 나는 그제서야 내가 생각한 것 외에 한 가지 상황이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 번째. 진석이는 잔뜩 경계를 한 채 자기가 들어온다는 티를 요란하게 내는 불법 침입자를 한 방에 날려버리려고 대기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것도 누군가가 - 누구겠는가? 뻔한 노릇이지. - 쥐어준 불법 무기를 소지한 채로. "연진석." 나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놈이 총 가지고 장난치다 잘못하면 관절이 빠질 수 있다는 걸 시건이 놈이 녀석에게 말해줬을까하는 의문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내 관자놀이에 딱 붙어 있는 이 쇳덩어리가 몹시 불편했던 것이다. "……방아쇠를 당겨버리고 싶군." 진석이 나를 알아보고는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시건방진 소리를 해대는 진석이에게 똑같은 소리를 해주고 싶었다. 정말 죽이고 싶을 만큼 반갑다 연진석. 관용어구가 아니라 수사적 의미 그대로의 심정으로 나는 중얼거렸다. **** 짧군요. 음;; 가장 완벽한 아침 12 "가." 싸가지 없는 목소리로 놈이 말했다. 잔뜩 쉬어 있는 거친 음성은 평소의 매끄럽고 세련된 녀석의 음성과 영판으로 틀렸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드라이 아이스 같은 목소리. 그리고 그 재수 없는 목소리가 실어 나르는 말의 내용은 목소리만큼이나 재수가 황이었다. "어딜 가?" "집으로 가. 이시건한테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형이 낄 자리는 없어." 술래잡기에 끼워주지 않겠다는 것 마냥 담담하게 - 허나 매정하게 - 녀석이 말했다. 누가 들으면 잘 되는 장사에 동업이라도 해달라고 매달린 줄 알았을 정도로 정 떨어지는 소리다. 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여기까지 얼마나 고생하면서 왔는지 아냐 개새꺄. 어디서 형님더러 가라 마라냐. "총부터 치워라 연진석. 너 좀 맞고 보자." 나는 손가락을 까딱 했다. 컴 온 베이비다 이 자식아. 내가 지금 농담하는 줄 아냐? 너는 복날 개 맞듯이 맞는 것도 부족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 토끼면서 형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었다니. 태도가 영 글러먹은 노릇인 것이다. "…멍청하게 굴지마. 한번 이용당한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 안 해?? 이시건한테 언제까지 휘둘리며 살 거야. 곱게 집에 돌아가. 이번 판, 현장 뛴 지 십 년 지난 늙다리를 껴줄 만큼 호락호락하지가 않아." 내 태도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읽은 것일까. 한 타임 입을 쉬었던 진석이 놈이 모진 소리를 했다. 부러하는 소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정도를 넘은 언사에 순간적으로 야마가 돌아 휙 하니 몸을 돌렸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저절로 손이 올라가는 것은 사내가 본디 폭력적인 피조물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녀석이 없어지고 나서 이틀 간, 나는 이십 년에 맞먹는 마음고생을 했다. 그런데 이 놈의 자식이, 형의 애간장을 그렇게 엉망으로 만든 주제에 혼자 잘났다는 듯 저 딴 소리나 하고 있는 것이다. 지 혼자 몸으로는 해결도 안될만큼 일을 벌일 놈의 새끼가 건방지게. 내가 본디 약한 것과 작은 것은 안 때리는 주의이건만 이 놈만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검은 짐승을 길들이는 것은 매 밖에 없다는 것이 고금의 진리인 바. 이 놈에게 일의 내력이라도 자세하게 들으려면 우선 북어 패듯이 납작하게 눌러놓고 봐야 할 것이라는 것이 순간적인 판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녀석에게로 몸을 돌린 순간, 올라간 손은 차마 내려오지 못했다. 녀석에게 호통치려던 입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건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목구멍에 풀이라도 발린 듯 지들끼리 딱 달라붙어 숨도 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내 표정을 본 진석이의 얼굴도 그다지 좋지가 않다. 내가 돌아서는 바람에 내 이마 정 중앙에 총구를 겨누게 되긴 했지만 손가락에 힘을 넣을 기분이 전혀 아닌 모양이었다. 표정이 아주 엉망이었다. 하긴. 저런 꼴을 하고 좋은 표정일 리가 없을 터였다. 어지간히 실없지 않은 이상 저 얼굴인 내내 기분이 저기압일 것은 인지상정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씨팔. 어떤 새끼야." 숨도 쉬어지지 않으려는 목구멍을 간신히 열어 말을 뱉어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진석의 얼굴은, 제 입으로도 나는 가진 게 얼굴밖에 없다고 뻔뻔스레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특출나게 잘 났던 연진석의 얼굴은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누군가가 아예 작정을 하고 망가트렸다는 것을 알아챌 수밖에 없을 정도로, 놈의 얼굴은 골고루 망가져 있었다. 유달리도 높은 콧날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부어오른 뺨에 거즈가 붙어 있었다. 찢어져서 터진 입가와 멍이 들어 얼룩한 턱. 놈의 얼굴은 프랑케슈타인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게다가 녀석은 왼쪽 귀에도 거즈를 붙이고 있는 상태였다. 빌어먹게도 그 거즈엔 피까지 배어 있었다. 고막이 나갔구나.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형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 "아가리를 찢어야 바르게 대답할래?" "상관없는 일에 참견하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하잖아. 이시건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건 형이 나설 문제가 아니야. 가진 건 몸 밖에 없는 주제는 나설 데 못 나설 데 못 가리면 큰 코 다친다는 거 저번 일로 배우지 않았어?" 싸가지가 없어도 보통 없는 게 아니다. 이렇게 재수 없게 이야기하는 인간은 난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연진석은 세상의 모든 멜로 드라마에 나오는 '싸가지 없고 쪼잔시러운 부잣집 딸내미'들보다 더 치사스럽고 재수 없게 말하면서 나를 도발했다. 내가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혹은 조금만 더 다혈질이었다면 진석인 아마 죽을 만큼 맞았을 거였다. 겨우 제 색깔인 피부들까지 모조리 푸르딩딩해 질 때까지, 온 몸에 안 맞은 데가 없어질 때까지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격분을 하는 대신 도리어 침착해졌다. 연진석이 개싸가지인건 원래부터 알고 있는 바였지만, 나한테 이러지 않던 놈이 갑자기 이러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눈칫밥도 남부럽지 않게 먹어봤다. 그러니 놈의 의도 따위는 손바닥을 읽듯 훤했다. "내는 배운 게 짧아서 연진석. 주제 파악도 못하고 분수 파악도 못하니 니가 알아듣게 설명하는 게 어때? 그 잘난 연진석이 얼굴이 왜 그 모양이 되어서 이런 구석에 숨어 있는 건지. 씨발아. 그 꼴을 하고 하는 설교가 먹힐 것 같냐?" 어떤 새끼야. 어떤 쳐죽일 놈의 새끼가 사람 꼴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빈정거리는 척 하려고 했다. 하지만 녀석을 비웃으려는 내 의도와는 달리 비틀린 입꼬리는 떨리고 있었다. 연진석이 정도 되는 놈이 저 지경으로 당할 정도면 상대는 프로라는 이야기였다. 프로의 손에 당했는데도 멀쩡하게 서 있다는 것은, 녀석이 당한 게 폭행이 아니라 린치였다는 것이다. 때려서 굴복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사람의 정신을 갈가리 찢으려고 하는 게 린치였다. 폭력 그 자체가 목적인 폭력. 그게 얼마나 사람의 정신을 망가트리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 놈을 보고, 놈의 그런 상태를 알아챈 주제에 녀석의 말대로 발 뺄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난. 애초에 그런 성격이었으면 좀 더 쉬운 인생을 살았을 테지 여기서 이런 꼴로 녀석과 마주 노려보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어림없는 소리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으면서 길게 쉰 말 하지 마. 나는 녀석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생각했다. 진석이 놈은 순간 눈을 피하려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를 악 물고 내게 다시 눈을 맞췄다. 불타는 듯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게 어지간히도 열이 오른 모양이었다. 녀석은 이를 갈면서 속삭였다. "상관하지 말라면 상관하지 마. 정말로 방아쇠 당길 수 있어. 위협이 아니라." "상관없다 새꺄. 죽여 봐. 니가 날 죽인대도 난 안가. 그러니 순순히 형 말 들어." '니가 날 쏠 수 있어?'라고 묻듯이 나는 일부러 녀석의 총구에 이마를 갖다대며 으르렁거렸다. 진석이 놈의 어금니에서 으득, 하는 듣기 험한 쇳소리가 났다. 녀석은 서슴없이 안전장치를 풀었다. 진짜로 쏘겠다는 듯이 말이다. 안 쫄아 이 새꺄!! 나는 중지를 세워 보이며 빙글, 재수 없게 웃어 보였다. "…머리는 아니라도 다리는 쏴줄 수 있어. 그래놓고 도망가면 형이 날 어떻게 잡을 꺼야?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 아니면 진짜로 해." "할 수 있으면 해보라니까. 계집애처럼 입만 살았어?" 나는 빈정거렸다. 싸늘하게 식어 있는 녀석의 음성에서 녀석이 진심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리가 없으면 두 팔로 기어서라도 따라가면 된다. 녀석은 한다면 하는 놈이었지만, 이 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방치해서 일이 이지경이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녀석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이제는 한 시도 내 눈 밖으로 나가게 하지 않을 거다. 연진석. 나도 진심이었다. 진석은 내 대답이 나오자마자 망설임 없이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나는 녀석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 틈에 녀석의 복부를 차 올렸다. 생각이야 어떻든 가능하면 총 같은 거에 몸이 뚫리지 않는 게 이득이라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남을 총으로 쏘려고 한 주제에 내가 공격을 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던 듯 녀석은 움찔 놀라 몸을 피하려고 했다. 평소의 녀석이었다면 이렇게 어리숙한 반응이 아닐 테지만, 놈은 이미 린치를 당한 몸이었다. 폭력의 기미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것은 본능이었으니까. 녀석도 그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늦었다. 나는 녀석의 오른 관절을 꺾어 올리며 손목을 내리쳤다. 녀석의 손에서 떨어져 내린 권총이 장판을 찍어 내리며 방구석까지 밀려갔다. 잘못하면 뼈가 나갔을 짓이다. 연진석 이 독한 놈의 새끼는 그래도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을 뿐더러 내가 꺾어 올려 옆구리에 낀 팔을 풀려는 듯 내 발등을 뒷꿈치로 그대로 찍어 내렸다. 재빨리 피하려고 했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이 새끼가 내 발가락뼈를 바스러트리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골이 찡할 정도의 고통이 신경을 타고 직격했다. 하지만 아프다고 몸을 굽혔다간 아까 진석이가 한 실수를 똑같이 따라하게 될 것이었다. 난 녀석의 팔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녀석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녀석을 한번 들어올렸다가 몸을 틀어 그대로 바닥에 내려꽂았다. 진석이는 손 쓸 새도 없이 납작해졌다. 낙법도 소용이 없는 터라 맨바닥에 그대로 내팽개쳐진 것이다. 독한 진석이도 이번만큼은 꽤 충격이 컸는지, 굵은 신음을 내뱉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잘하면 내장이 다 터질 수도 있는 큰 기술에 고스란히 걸렸으니까 말이다. 이른바 잭해머라고 하는 거였다. 프로레스링 기술이지만, 직접 당하면 쇼라고 웃을 수 없는 놈이다. 녀석은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싶었다. 정신도 못 차리고 있는 놈의 몸 위에 그대로 체중을 밀어붙인 채 나는 녀석의 두 손목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내 밑에 깔린 녀석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녀석은 이를 악물듯이 말을 뱉어냈다. "…비,…켜." "진짜로 쏠려고 했지 이 자식. 대가리 컸다고 형한테 개기기나 하고." "비켜…씨팔. 허리……허리,…." 도망갈 생각은 아예 말라는 듯이 녀석을 타고 누르고 있었다. 근경련이 일어나는 듯 움찔 움찔 떨리는 팔다리는 채 바르작거리지도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이상한 것은 녀석의 얼굴이었다. 아프다는 것은 알겠지만, 식은땀이 조금씩 배어 나오기 시작하는 얼굴은 정도를 넘어서게 고통스러워 보였다. 나는 처음에는 녀석이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말을 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를 악 무는 표정이 어째 심상치가 않았다. 정말로 내장이 터졌나 싶어 슬그머니 걱정이 된 나는 녀석을 누르던 것을 그만두고 몸을 세워앉았다. 그런데, 그게 결정적인 실수였던 모양이었다. 으득-하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렸다. 녀석의 허리를 타고 앉은 허벅지를 타고 몸 속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진석의 얼굴이 정말로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떨리던 것조차 멈추고 그대로 축 늘어지는 꼴이 심상치가 않다. 나는 진석이 '허리,'라고 말하던 것을 깨닫고는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멍청한 자식이었다 나는. 안 그래도 허리가 아프다고 하는 애의 허리를 타고 앉아 체중을 실었으니 녀석의 허리가 나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황급히 녀석의 몸에서 내려와 녀석을 살폈다. 새하얗게 질린 녀석이 마네킹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갈데 없는 시체 꼴이라 겁이 더럭 났다. 씨팔. 애 살리러 왔다가 애 죽인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피떡이 된 애를 매트리스도 없는 맨땅에다 메다꽂는 정신머리라니. 나는 녀석을 들쳐업었다. 가뜩이나 무거운 녀석이 의식이 없으니 이건 완전히 쌀푸대였다. 병원은커녕 집밖에도 나갈 수 없는 처지에 일을 만든 나는 스스로에게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침실로 들어갔다. 어찌되었든 우선 응급처지는 하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골격이 어찌된 거면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양아치 생활 오년 하고 나면 접골원을 차려도 된다. 그런데 나는 반 건달을 십년 가까이 한 놈인 것이다. 아예 바스러진게 아닌 다음에라면 뭔가를 해 볼 자신이 있었다. 침대에 놈을 내려놓고 단추를 풀었다. 시퍼렇게 피멍이 든 쇄골이 아프게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이 정도의 자국이 남을 정도면 처음 맞았을 때 한동안 숨도 못 쉬었을 테다. 녀석을 린치한 놈과 다름없게 패놓았으면서도 그 자국을 보니 새삼 분통이 터졌다. 어떤 놈인지 잡히기만 해봐라. 주리를 틀어줄게다. 사람을 이 지경으로 패는 그 독한 심성머리 가지고는 살아있는 자체가 민폐 일테니 차라리 내가 죽여주마. 속으로 중얼중얼 욕을 하면서 나머지 단추를 풀었다. 분노에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녀석의 상태가 험악하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기에 단추를 푸는 손은 서슴이 없었다. 녀석의 가슴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슴과, 명치와, 그리고 배꼽이. 녀석의 상태는 처참했다. 내가 이렇게 상태가 엉망인 애에게 매를 보탰다는 사실이 민망할 정도였다. 어디가 얼마나 상한 거야 도대체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불이 뇌를 태우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녀석이 정말로 어떤 꼴을 하고 있는 건지가 알고 싶어진 나는 망설임 없이 바지까지 벗겨 내렸다. 대체 그 개 같은 자식들이 애한테 무슨 짓을 해놨는지를 알아야, 그대로 돌려 줄 수가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 녀석의 멍을 보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손이 멈추었다. 시선이 닿은 곳에 있는, 믿기 힘든 어떤 자욱들 때문에. 녀석이 아프다는 것, 녀석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 녀석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새끼를 찾아 죽여 놓고 말겠다는 것, …등등. 그때까지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생각들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상처를 확인하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속이는 짓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거 뭐야, 연진석." 이를, 악물었다. 녀석의 허벅지에 난 시커먼 멍이 눈을 태울 듯이 달려들었다. 사람의 손자국 모양이 고스란히 찍힌, 깨물고 씹혀서 너덜해진 속살 위에 선명한 멍자국. 녀석의 팬티는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녀석의 바지 뒤편도 마찬가지였다. 피가 흘러내려 완전히 엉망인 뒤편은 생리 터진 여자가 입었다 벗어놓은 것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씨팔. 이거 뭐야. 이거 뭐냐구 연진석!!" 사슴같이 길고 하얀 다리가 힘없이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며 나는 치솟아 오르는 구역질을 간심히 삼켰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번쩍하고 플래쉬가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녀석의 비명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것 같았다. 사내. 혹은 사내들. 나는 그 잔혹한 광경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시은이가 당했던 꼴을 봤었다. 감옥 안에서, 힘없는 녀석들이 당하는 꼴도 봤었다. 그런데 그 꼴을, 그 더러운 꼴을 이 녀석이 당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화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아니, 화가 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증오였다. 이것은 광기고, 이것은 피를 끓게 만드는 분노다. 그게 얼마나 더럽고 욕지기나는 일인데. 그게 얼마나 무서운 폭력인데.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진석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만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이 불쌍한 녀석이 뭘 그렇게 나쁜 짓을 했다고. 이 새끼가 왜!!!!!!!!!! 눈동자 안에서 핏줄이 터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참을 수 없었던 심정이 걸레처럼 너덜해졌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희망형이 아니라, 죽여야 한다는 의무로 살의(殺意)가 와 닿는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 일을 저지른 댓가가 될 수는 없었다. -그제야 나는, 처음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시은이의 일로 시건이가 느꼈던 기분을. 그, 감정을. 전부터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어설픈 추측을 했을 뿐이었다. 근본적인 감정과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무언가를 막연하게 연상하며, 시건의 감정이 그런 것이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건이가 느꼈던 것은 그런 감정이 아닌 것이다.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당사자의 가족이 아니고서는 알지 못하는 이 기분은 내가 생각했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래. 달랐다. 나는 녀석이 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주위의 만류를 무릎 쓰고 그런 짓을 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미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이런 감정을 느꼈다면. 이런 광경을, 자신의 눈앞에서 실제로 보았다면 말이다. 내가 이렇게 되었듯이 녀석 또한 그렇게 되었음이 틀림없을 터였다. 녀석도 나처럼,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미쳤으리라. /너 지금 어디야?/ 태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담뱃불을 붙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정에서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렇게 있었던 것일까. 떨리는 손을 들어 배터리를 찾아 연결을 하자마자 폰이 울렸다. 정말 어지간히도 전화를 해 댄 모양이었다. "…어떻게 됐어 시건이네 부모님은?" 칼칼하게 쉰 목소리가 났다. 소리를 지른 적도 없는데, 완전히 잠겨버린 목소리는 거칠고 푸석하기만 했다. 나는 내 눈앞에서 정신을 잃고 있는 진석을 우울하게 내려다보았다. 불도 켜지 않아 깜깜한 방안은 창 밖의 네온사인에 비치는 희미한 빛만으로 간신히 사물이 분간이 됐다. 망가진 인형 같군. 나는 새파랗게 질린 채 누운 진석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철로 만든 꼬마병정이 벽난로 불에 녹았었다던가 하는 기억도 희미한 동화가 떠오를 지경이었다. /오후 여섯시에 벌써 한국 뜨셨어. 이탈리아에 시건이 삼촌 계시다길래 그쪽으로 가 계시라고 했지. 직항 비행기가 없어서 우선 일본으로 보내드렸어. 거기서 다시 갈아타시면 될 거야. 시건이가 미리 준비 해놨었어. 날짜는 오픈으로, 시간별로 아침 점심 저녁분 세 개를. 그걸 전해드린 것 뿐이니까 나는./ "그놈도 참 용의주도한 놈이군." 여러모로 놈은 많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이 집을 마련 한거나, 이 집의 위치를 미리 내게 알려줬었던 것이나. 자신하고는 직접적인 친분도 없는 태규에게 선을 이은 것이라던가. 그래도 용서는 할 수 없었다. 녀석이 이용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진석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놈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진석이를 저 꼴로 만든 원인 중에 하나가 그 녀석이기 때문에. 나는 내 친구인데도 불구하고 그 녀석이 적으로 여겨졌다. 이 집에서 당장 나가고 싶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시건이 마련한 집에서 진석이를 돌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남 이야기 할 때가 아니야. 너 지금 어디야. 어디서 뭘 하는 거야?/ 태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에라도 갈아 죽이고 싶다는 듯한 음성이지만, 놈이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모르는 게 이득이다 선우태규. 놈들이 너까지 알아내는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진석이 새끼랑 같이 있는 거지 너./ "그것도 모르는 게 좋아." /이 새끼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이용해 먹을 대로 이용해먹고 꺼지라 이거냐. 일이 어떤 지경으로 돌아가는지 내가 아는데-/ "끊자. 더 이상 전화하지 마라. 다시 밧데리 빼 놓을 테니까. 너 할 일 다 했으면 됐어. 이쯤에서 신경 꺼. 내가 알아서 해." 녀석의 말을 끊고 내 할 말만 했다. 시건이 놈이 어째서 태규를 끌어들였는지 알겠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태규는 우리 일에 더 이상 관련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기도 했다. 이제 뒷골목하고는 완전히 상관없이 사는 저 녀석이 다시 똥통에 빠지는 꼴은 내가 못 볼 수 없었다. 녀석이 이제 고래고래 악까지 쓰는 걸 들으면서도 나는 서슴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녀석에게 했던 말 그대로 밧데리를 뺐다. 연관되서 좋을 거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상관도 없다고 말하면 녀석이 섭섭해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 일은 태규와 상관이 없는 일이다. 이제껏 폐를 끼친 것만으로도 충분히 죄 받을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녀석만 바라고 사는 홀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선은 분명하게 긋는게 편했다. - 여기에 형이 낄 자리는 없어. 그런 생각을 하는 내 귓가에, 환청이 울렸다. 아까 오후에 내게 총부리를 겨눈 진석이 했던 말이었다. 나는 진석이 내가 태규에게 느끼는 바로 이 기분을 가지고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다리에 총을 쏘려고 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차라리 그렇게 해서 날 떼어 내는 게 내게 더 안전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진석의 옆을 떠날 수가 없었다. 녀석이 나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녀석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태규가 내게 느끼는 감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태규는 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리로 달려오려고 하는 거였다. 사정이 나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이라도 힘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놈은 그런 놈이었다. 그러나 나는 진석이 위험하기 때문에 도망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아예 그렇지 않은 것만은 아니지만 내가 여기에 남아 있는 이유 중에 그 이유는 그다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진석은 내게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었다. 기댈 사람 하나 없이 사고무친으로 외로울 뻔했던 내가 이날까지 이 악물고 살아온 것은, 내 등뒤에 이 녀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이 내 등을 보고 있을 테니까 나는 허리를 똑바로 펴고 있었다. 녀석에게 부끄럽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인간 된 도리를 지켰다.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내 결심이 아니라 이 녀석이 나를 보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런 아이였다, 진석이는 나에게. 진석이가 나를 위해 복수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녀석이 내게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진석의 옆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여기를 떠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는 어디로도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녀석의 옆이 아니라면 나는, 갈 데가 없었다. ********** 아, 오랜만이네요... 욕 먹겠다...(히죽) 가장 완벽한 아침 13 냉장고 안은 그득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농업생산품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냉장고 안에 들어 있는 식품들은 100% 인스턴트와 레토르트 제품들이어서 가정집 냉장고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편의점의 그것을 닮아 있다. 은신처라고 마련해놓은 곳이니 당연하겠지만, 앞으로 한동안 이것들만 먹고 살아야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져 왔다. 이래뵈도 요식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인데, 요식업(혹은 분식업)의 적인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를 연명해야 한다는 것이 마땅치가 않아 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불만스럽다고 하더라도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현실에 적응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밥은 해먹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시기에 밖으로 나가도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대로 봤을 때, 지금쯤이면 시건이가 대정의 손아귀에서 몸을 뺐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조급하던 놈들에게서 인질까지 사라졌으니 눈에 불을 켤 것은 당연한 일. 거리에 어떤 눈들이 돌아다닐지 모르는 일이었다. 시건이 녀석이야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겠지만 인간이 한 일인 이상 완벽할 수는 없었으니 그 놈들이 여기를 아예 모르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내가 최대한으로 바랄 수 있는 것은 되도록 늦게 발견되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리라. "쳇." 혀를 찼다. 누굴 원망하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증오와 분노에 불타오르는 것도 허기가 지면 하기 힘든 일이다. 어쩔 수 없다. 결단을 내린 나는 개중에 나아 보이는 인스턴트 제품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옥수수 스프의 가루와 인스턴트 카레다. 무슨 미트소스 스파게티니 하는 이상야릇한 것들도 있었지만, 그나마 익숙한 맛이 먹기에 편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두 가지를 택한 것이다. 나는 우선 지독하게 맛이 없을 인스턴트 스프의 가루를 우유에 풀었다. 숟가락의 뒷등으로 가루를 개면서 한숨을 쉰 건, 식사를 제대로 해야 할 환자가 이따위 것이나 먹고 있어야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놈을 엎어놓고 자세히 살펴보니 허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근육이 뒤틀린 건데, 고작 그걸 가지고 여섯시간 이상 못 깨어나고 있다는 것은 녀석이 정신을 잃은 이유가 단지 고통 때문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탈진일 수도 있고 쇼크 증상 일수도 있었다. 내가 의사가 아니니 정확한 진단 따위야 내릴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반 의사는 돌팔이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반건달이 접골 외의 뭔가에 자신감을 가진 다는 것은 사람 잡을 일이므로 나는 감히 그 정도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우제열." 그렇게, 숟가락으로 곱게 갠 스프를 불에 올려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처음에는 잘 들리지도 않았기에 '어라? 뭔 소리가 났는데?' 싶은 기분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어딘지 모르게 억눌린 비명에 비슷한 느낌으로 다시 한번 내 이름이 불리웠다. …아니.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을, 목소리를 높인 고함소리로 연호되었다. "우제열! 우제열!!! 우제열 데려와!!! 야 이 자식들아!!!!!" 나를 부르는 것치고는 뭔가 이상한 어법이다. 뇌를 다친건가? 저 자식이 지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지만, 녀석이 내 이름을 부르는 방식에서 느껴지는 공포감이 거슬려 그 부름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눌지 않도록 스프를 젓고 있던 숟가락을 그대로 손에 든 채 안방으로 향했다. 잘 자라고 불을 꺼뒀던 어둑한 방안에 다시 불을 켰다.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잡아먹을 듯 사나운 진석의 눈빛이 나를 맞았다. 금방이라도 무슨 욕을 내 뱉을 듯이 으르렁거리던 녀석이, 나를 보더니 일순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어째서? 그렇게 애타게 나를 부르더니?? 나는 기절에서 깨자마자 이해할 수 없이 묘한 행동을 하는 녀석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불렀어?" "…뭐야 이거?"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걸 누가 가르쳐주지 않던? 까끌하게 쉰 목소리가 거슬리는 어투로 녀석은 중얼거렸다. 나는 숟가락을 그대로 쥔 채로 팔짱을 꼈다. 핼쓱하니 식은땀이 잔뜩 흐른 애처로운 얼굴을 한 녀석은 눈을 굴리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형, 괜찮아?" "어떤 주리를 틀 놈이 총 가지고 쏴버린다고 설쳐대긴 했었지만, 일단은 괜찮지. 왜?" "누가, 온 거 아니지. 여기가 들켰다던가…." "아직은 그런 일이 없는데." 녀석은 내 말을 듣고서야 마음을 놓은 모양이었다. 희번덕거리던 눈을 내리깔고 이쪽에서 보기에 애처로울 정도로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면 말이다. 뚝하니, 눈물처럼 땀이 녀석의 손등으로 떨어졌다. 녀석은 땀을 닦으려는 듯 손을 들었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퍼뜩 고개를 치켜올렸다. "그럼 이거 형이 한 거야?" "그래." "씹-. 사람 헷깔리게 무슨 짓이야. 변태야? 왜 사람을 묶어 놓고 지랄이야??" 무슨 오해를 했는지 대충 알만하다만 잘한 거 하나도 없으면서 목에 핏대를 세우는 꼬락서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녀석은 내게 이를 드러내면서 바둥바둥 팔을 묶은 줄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잘 될 리가 없었다. 풀기 쉬우라고 묶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상처가 나지 않도록 일단 수건을 덧대고 녀석의 두 손을 빨래 줄로 꽁꽁 묶었던 나는 녀석의 헛된 몸부림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확실히 머리를 다치기는 한 모양인지, 될 리가 없는 짓을 한참동안이나 끙끙거리며 노력하던 녀석은 한참 후에야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이를 드러냈다. 아무리 해도, 제 힘으로 그것을 풀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이거 풀어." "일부러 묶어놨는데 왜?" 스프가 묻은 숟가락을 빨면서 태연스레 대꾸했다. 녀석의 고양이처럼 새초롬한 눈매가 찢길 듯이 치켜 져 올라갔지만 녀석의 시선 따위에 겁먹을 이 몸이 아니셨다. 나는 일부러 녀석에게 다가가 침대 옆에 앉았다. 녀석은 발로 나를 걷어차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그것도 여의치가 않은 듯 했다. 당연하다. 녀석의 두 발도 내가 묶어놨다. 대체 무슨 용도로 쓰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집안에는 빨래줄의 여분이 참으로 풍부했던 것이다. "왜 묶어 사람을? 이거 정말 못 풀겠어??" "잠시 한 눈 파는 사이에 깨서는 몰래 도망이라도 가버리면 내가 낭패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왜 묶었겠나." 사지가 다 묶였으니 움치고 도망갈 수도 없는 놈이다. 우선은 느긋하게 가자 싶어서 머릿속에서 끓어오르는 온갖 감정을 삭히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녀석은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하긴 사람을 굴비 두름처럼 꽁꽁 묶어놓고 이리도 당당하니 그럴 수밖에 없기야 하겠지만, 이쪽도 나름대로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지금 심정 같아선 정말 정신 못 차리게 쥐어 패고 싶다 이 새끼야. 내가 손 안 대게 그냥 있어.' 나는 마음 속으로 녀석에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런 꼴을 당하고 왔다는 것에 대해서라면, 나는 녀석을 그런 꼴로 만든 놈들 못지 않게 녀석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녀석이 내게 미리 언질이라도 해줬더라면 오늘의 이런 참담한 사태는 없었을 게 아닌가 말이다. 사람 마음에 이렇게 피멍이 들게 해놓고 대체 뭐가 잘났다고 따박 따박 말대답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풀어. 정말 화내는 수가 있어." 내가 눈썹 하나도 깜짝하지 않으니까 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녀석이 이를 갈면서 중얼거리는데, 화내는 수가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이미 화가 난 눈치였다. 나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화 내." "풀어!" "같은 말 여러 번 하는 취미 없는데." "빨리 풀어. 빌어먹을. 소름이 다 돋았단 말이야. 정신이 들고 보니까 손발이 다 묶여 있길래, 그 새끼가 여기까지 찾아낸 줄 알고 얼마나 놀랬었는데. 이런 장난하면 재미있어?" "누가 장난 이랬는데?"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조용히 물었다. 녀석은 굼벵이처럼 꿈틀 꿈틀하면서 앉으려고 기를 쓰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이를 악물면서 녀석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 새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네. 그 새끼가 누구냐 연진석. 어떤 새낀데 자존심 빼면 시체인 연진석이 경기까지 하는 거지?? 그 새끼 취미가 묶는 거였어? 그런 식으로 재미 보니까 좋든?" "……무슨," "모른 척 시치미 뗄 생각은 아예 마시지. 여기까지 오면서 내가 아주 까막귀 였을 것 같냐. 들을 거 못 들을 거 다 듣고 왔는데, 아무리 그래도 본인이 변호할 기회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래. 이야기는 들어주지. 대신 사실만 이야기 해. 괜히 깐죽거리다가 그렇지 않아도 엉망인 아구창 날아가지 말고." 이를 드러내면서 웃는 자신의 얼굴이 꽤 위협적이라는 것은 나도 이미 아는 일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 진짜로 화가 나 있었다. 농담 따먹기 따위를 할 기분이 전혀 아닌 것이다. 차갑게 가라앉아 번들거리는 내 눈빛을 이제야 느꼈는지 진석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녀석은 내 눈동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갈라진 입술을 힘겹게 움직였다. "내가 왜 너한테 변명을 해야 하는데?"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반말은 해도 단 한번도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던 녀석이 함부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의도가 너무 빤하게 보이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반항기에 이른 것 마냥 맞먹으려고 대드는 놈을 바라보며 나는 조롱하듯 오른쪽 눈썹을 휘어 올렸다. 그딴 도발에는 안 넘어 간다 아가야. 내가 언제까지 피 끓는 십대인 줄 아냐. "나랑 무관한 일이냐.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서 내가 귀 막고 돌아서 있으면 상관없어지는 그런 일이야?? 이 일에서 나만큼 알아야 하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는데." "무슨 헛소리야. 이시건이 그러든? 너랑 이번 일 상관 있다고?? 그렇다면 너 속은 거다 등신아. 너랑 아무런 상관이 없어 이번 일은. 넌 이용당하는 것 뿐이야." 녀석이 노가리를 깠다. 그러면서도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커다란 두 눈동자를 똑바로 뜨고 형님을 쳐다보신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새끼야. 형님이 그렇게 병신으로 보이냐. "백동영, 상관없다고? 대정이라는 이름하고 내가 상관이 없어?" 백동영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면 쓰레기라도 치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진석은 그 이름을 듣고도 아무런 동요도 없는 것 같았다. 이미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긴.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녀석이 짐작하지 못 했을 리는 없겠지. 녀석은 문득 한숨을 쉬었다. 내가 단단히 마음먹었다는 것을 그제야 눈치를 챘다는 듯이. 한숨과 함께 씁쓸함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 또한 잠시 잠깐. 녀석은 곧 무표정으로 돌아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형이 판단할 문제지만, 적어도 내 행동하고 형은 상관이 없었어. …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 알만해. 이시건이 형을 어떻게 부추겼는지도 알만한 일이고. 하지만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아무리 형을 좋아해도, 내가 아무리 어머니를 좋아해도-. 남의 복수 같은 걸 하려고 십 년 동안 그런 개새끼한테 몸을 팔지는 않는단 말이다. 그것도 자의로 말이야." "하아?" 나는 담배 연기를 녀석의 얼굴로 뿜어주며 빈정거리듯이 웃었다. 녀석이 나를 회유하려고 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해서 나를 돌려보내려는 수작을 하는 거라고, 그렇게 여겼다. 녀석은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 얼굴을 하고서도 표정변화가 다채로운 꼴이 퍽이나 신기하게 여겨졌다. "비꼬지마. 쥐뿔도 없는 게 어설프게 정의감만 있어서 자기 몸도 제대로 못 챙기는 천치가. 세상 사람들이 다 형 같은 줄 알아? 인간이란 동물을 그렇게도 몰라? 남의 중병보다는 내 손끝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픈 게 인간이라는 거야. 개 중에 몇은 성인(聖人)이 있는 모양이지만, 적어도 나는 그 부류가 아니라고." "그래? 그럼 백동영이 첩 노릇은 대체 왜 했는데? 말 들어보니 좋아서 붙어먹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썩을. 누군 좋아서 그 새끼랑 붙어 먹었는 줄 알아? 꽃 같은 스무살짜리가 아버지 뻘 되는 놈한테 좋아서 댔겠어? 덮어놓고 따는 걸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 내가 안 튀어본 줄 알아?? 서울도 못 벗어나고 잡혀서 머리채 잡혀 다시 끌려갔었어. 그래. 내가 그 새끼 등 땄다. 그래서 내가 녀석 등뒤에다 칼 찔러 넣었지. 부르투스 너마저도? 웃기지 말라 그래. 그 새끼는 원래부터 내 적이었어. 나한테 그래놓고 무사하길 바래? 내가 그런 꼴을 병신 같이 당하고만 있었을 것 같애? 백승언이 없고 이시건이 없었어도 했어 나는. 나 혼자서라도. 백동영 죽이고 나까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날 이 꼴로 만들었으면 저도 똑같이 당해야지. -이게 다야. 이게 이 이야기 전말 전부고 끝이야. 형이 들어갈 부분? 미안하지만 단 한 군데도 없어." 녀석이 악을 쓰며 말했다. 내 복수다! 형하곤 상관없어!!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녀석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녀석은 건방지게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진짜 제가 사실을 그대로 말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앙큼한 놈이었다. 장장 십 년이나 나를 속이고 살았으니 이 정도는 되어야 남부끄럽지는 않을 노릇이겠지만, 이렇게 기를 쓰고 형을 속여먹으려고 드니 이날 이때껏 놈을 뒷바라지했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이 몸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파 왔던 것이다. 나는 이 놈을 이리 키운 기억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은데. 너 자꾸 형님한테 거짓말하면 혼난다." "젠장!!!!!!!! 뭘 원하는 거야 도대체? 그게 사실이야. 뭘 듣고 싶어서 이래? 아니면 형이 원하는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라는 거야? 다리 부러진 제비새끼가 돌봐주고 키워준 주인집 은공 못 잊어서 박씨 물어다 주는 대신 주인집의 복수를 해줬다는 그런 이야기?? 말해. 대체 뭘 이야기할까??" 신경질이 가득 찬 투로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지나치게 흥분한 듯한 놈을 냉정하게 바라보던 나는 입 꼬리를 뒤틀면서 녀석의 질문에 답했다. "십 년 전에도 손댈 수 없을 만큼 거물이던 백동영이랑, 니 말대로 꼴랑 스무살짜리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가 대체 어떤 장소에서 맞닥트릴 수 있었는지 하는 것부터." "……그-." 녀석이 순간 말을 못했다. 나는 녀석이 말을 못하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녀석을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녀석을 비웃는 듯 올라갔던 입꼬리가 천천히 떨리는 것을 나는 느꼈다. 녀석의 앞에서 절대로 동요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표정관리가 그다지 완벽하게 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방금 전까지 흥분한 듯 빽빽거리던 진석의 녀석의 표정이 점 점 더 싸늘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녀석도 직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 입에서 대체 무슨 이야기가 나올 것인지. "나는 평소에 궁금해하던 것이 있었어. 우리 어머니가 평생 모았던 전 재산인 전세금. 내가 백승지 그 꼴로 만들었다는 바람에 날렸다는 그 돈 말이야. 그게 대체 어디로 갔는지 난 참 궁금했었거든?? 분명 우리 어머니, 백동영에게 그거 들고 갔다가 몰매 맞고 쫓겨나서 앓아 누우셨으니까. 그렇다는 건 우리 어머니가 그 돈을 백동영한테 못 찔러 줬다는 건데, 어째서 그 돈이 종적도 없이 사라진 지 알 수가 없더란 말이야. 면구스러워서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그거 눈치도 못 챌 만큼 나 바보는 아니거든. 근데 지금은 그 돈이 어디 갔는지 짐작이 가. 전혀 의외의 인물이, 평생가도 상관이 없어야 할 인물이랑 연결이 되는 것을 본 순간 그게 어떻게 됐는지 짐작이 가더란 말이지. …연진석. 너지? 어머니 대신 해서 그 돈 가지고 백동영 찾아간 게. 네 말대로 백동영한테 그 짓 당한게 스무살 때라면 시기가 딱 맞아. 그때 백동영을 만난 거지 너." 그 돈을 가지고서. 앞 뒤 분간도 못하고 날뛴 멍청한 새끼하나 살려보자고. 골병이 들어 앓아 누운 내 어머니를 대신해, 그렇게 구걸하러 갔었겠지 네 놈은. 그렇게 가서 너 그 더러운 인간이랑 만나게 된 거잖아. 그렇지 않았으면 평생 만날 일이 없었던 그 쓰레기를 그때 만나, 오늘 이 꼴을 하고 내 앞에 누워 있는 거잖아. 안 그래? 나는 심장을 누군가가 으깨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생각했다. 나란 놈, 나란 인간… 생각할수록 지긋 지긋 했다. 아무리 살기가 힘든 날이 있었더라도 자기 자신을 쳐죽이고 싶어질 날이 올 줄은 차마 몰랐는데 말이다…. 내가 미칠 것 같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 놈이 무슨 짓을 당했는가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 놈이 이 꼴을 하게 된 원인이었다. 이 놈의 망가진 인생의 원인을 제공한 인간. 이 놈이 그런 쓰레기 같은 작자에게 무릎꿇어야 하는 원인을 만들었던 놈이 문제였다. 바로 그 놈이, 잘난 척 하면서 녀석의 앞에서 있는 자기 자신 이라는 게 이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 "근데 나 때문이 아니라고? 새끼야. 구라를 쳐도 믿을 만하게 쳐. 내가 그렇게 돌대가리로 보이냐." 나는 중얼거렸다. 입안 가득 쇠의 쓴맛이 느껴진다. 말을 하면서 스스로의 속살을 씹어댔던 탓에 연약한 점막이 상처나 피가 배어 나온 것이다. 치미는 구역질에 속을 가라앉히며 이를 악 물었다. 녀석 앞에서 내가 상처 입었다는 듯이 구는 것은 참을 수 없이 추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녀석의 앞에서 자신의 흉터를 자랑할 주제가 못되었다. 누굴 탓할 주제는 더군다나 못된다. 결국 이 일의 궁극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놓고 누굴 원망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노릇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자신이 부끄러워 본 적은, 달리 없었다. 가장 완벽한 아침 14 "…백동영은 날 사랑한다고 말했어." 진석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나한테 잘 해줬지. 솔직히 말해 나한테 그보다 더 잘 해 준 사람은 형네 어머니뿐이었으니까 말이야. 처음에는 정말 나를 린치하기 위해서 이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납게 굴었지만, 내가 포기를 하고 나니까 돌변하더군. 세상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는 투였어. 내가 해 달라는 것은 다 해줬었지. 집도 사주고, 차도 사주고. 처음에 사준 차는 그 당시 나온 국산차 중에서 가장 좋은 기종이었어. 배기량 3000cc가 넘는 중형차더군. 스무살짜리의 남자애가 타고 다니기엔 지나치게 부담스러워서 일주일만에 열쇠를 돌려줬었지. 그랬더니 그 다음날 벤츠가 오더군.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었다면서. 그 국산차는 벤츠가 나오는 기간 동안에 필요할 것 같아서 준거라고. 그래. 잘해줬었지. 그 남자는 완벽한 패트런이었어." '완벽했다'라고 하면서도 진석의 어조에는 참을 수 없는 환멸이 배어 있었다. 녀석은, 내가 백동영의 이름을 말할 때와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그 이름을 말했다. "…………." "그 남자는 내게 선물을 할 때마다 속삭였어. 사랑한다고. 정말로 너는 아름답다고. -나는 그 남자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소름이 끼쳤어. 정말로 사랑에 빠진 듯 달콤하게 구는 그 남자를 보면서 나는 미칠 듯이 두려웠지. 남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어. 그 남자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지. 남자가 아무리 달콤하게 말해도, 아무리 자주 말해도……그렇다고 해서 거짓이 진실이 되는 일은 없어. 더군다나 그 남자 자신도 믿지 않은 일을 내가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 형도 알다시피 난 아버지란 작자가 뒈지기 전까지, 매일매일 내게 퍼부어지는 폭언과 경멸을 들어왔었어. 그런 내가 그 남자의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 같아? 천만에. 나는 알고 있었어. 속을 수가 없어서 괴로운 경우가 있다면 바로 이 경우일 거야. 피가 마르는 것 같았어. 속절없이 세월은 흘러갔지만, 남자의 의도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알 수가 없었어." "………" "그렇게 칠년이 흘렀을 때 나는 알았어. 그 남자가 날 뭣에 쓰려고 했는지. 무려 칠년 동안이나 그 남자와 내가 살붙이고 살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백승언이 마침내 내게 다가왔을 때 나는 알았지. 내가 머릿속에서 맞추고 있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제 발로 찾아온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말이야. 백동영은 자기 조카가 언젠가는 자신을 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 전에 자신이 칠 결심을 했던 거지. 형은 몰랐겠지만, 백승지가 사지가 부러졌던 때는 백승언이 막 자신의 아버지의 뒤를 이은 시점이었다고 해. 그랬기 때문에 백승지가 린치 당했을 때 백동영은 자신의 조카를 제일 먼저 의심했었지. 그리고 백승언이 아들을 린치 했을 거라는 오해를 풀고 나서는, 전보다 더욱 크게 백승언을 증오하기 시작했어. 백승언이 형들을 잡는데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 남자는 오히려 은근히 백동영의 망신살을 즐겼다는 군. 보스의 숙부에다가 회의 핵심간부. 게다가 아직도 현역이지. 백승언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인간은 자신의 숙부였으니까 말이야. 그런 숙부가 겨우 다섯밖에 안 되는 건달패들을 몇 달 동안이나 잡지 못한데다가, 결국은 상대와 타협을 했어야 했잖아? 대정 안에서 백동영의 위신이 엉망이 된 것은 자리를 계승한지 얼마 안 돼 기반이 단단하지 못했던 백승언에게 하늘이 주신 행운이나 다름이 없었지. 그래서 백승언은 백동영에게 조금의 도움도 주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형들의 도주로를 터주기까지 했을 거야. 그러니 백동영이 자신의 마음 속으로 칼을 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는 형들보다는 자신의 조카가 더 증오스러워 했어. 자신이 원했던 유일한 자리를 빼앗긴 데다가, 오히려 자신의 위기를 이용당하기까지 했으니 말이야. 그 남자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지. 나는 그 계획의 일부였던 모양이야. 자신의 곁에서 조작된 거짓정보를 조카에게 전달해 조카의 전략을 혼란시키는 요인으로써의 존재. 그의 커다란 대계를 굴러가게 하는데 있어 작지만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톱니바퀴. 그 남자의 머릿속이 그 계획으로 꽉 찼을 때 마침 내가 눈에 뜨인거지. 지독하게 운이 나빴던 거라고 생각해. 말하자면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 거지.." "…………." 마지막 말은 날더러 웃으라고 한 농담인 모양이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얼굴 근육이 다 굳어 버린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녀석의 말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던 것이다. 그러나, 녀석은 내 반응 따윈 애초부터 염두 해두지 않았었는지 호응이 없다는 사실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처지를 조소하는 듯한 모양새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지나치게 예뻤던 거야. 누가 봐도 자신의 애인이라고 믿을만한 최상급의 인간을 고르고 있던 백동영의 눈에 단박에 들만큼. 게다가 얼굴 외에도 나에게는 이점들이 있었어. 어리고, 영악한데다, 남자이기까지 했거든. 백동영은 이성애자였어. 동성애 취향은 눈곱만큼도 없었지. 그래서 그 남자는 깨달았지. 자신의 '애첩'이 남자라면 그가 오랫동안 살붙이고 살아도 정을 붙이진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 남자는 나를 사람이 아닌 도구로 봤어.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그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 나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본 걸, 용서할 수 없었어. 남의 인생을 자기 자신을 위해 그렇게 멋대로 소모품으로 이용하려고 한 것에 대해 대가를 치러주겠다, 그렇게 생각했지." 진석은 진지한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한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형 탓 전혀 안 했다고는 안 해. 나도 인간인지라, 내 인생 꼬이게 만들었다며 형을 꽤 미워했던 적도 있어.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지. 형이 날 이렇게 만든 게 아니야. 형을 원망했던 건 백동영보다 형이 쉬운 존재였기 때문이지, 정말로 형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었어. 내가 약한 거였어. 백동영이 무서워서, 감히 그 남자에게 덤빌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비겁하게 굴었던 거니까 그건. 그러니까 형도 착각하지마. 형 때문이었다면, 형도 죽였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은 상관없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당신 복수 따윌 한 게 아니니까. 당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은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였고, 백동영과의 단 둘이서 해결할 문제였고…이미 해결을 한 문제니까. 그러니까 형은 상관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진석은. 나는 명치끝이 꽉 막히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진석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기나긴 이야기를 마친 녀석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대답 없이도 잘 이야기하더니만, 이번에는 대답이 꼭 필요한 모양이었다. 나는 녀석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결론은, 나 때문에 만난 게 맞다는 거지 연진석?" 진석의 눈빛이 흔들렸다. 녀석은 기가 막힌 듯 입을 벌리고 있다가, 나를 향해 빽하니 소리를 질렀다. "-대체 뭘 들은 거야 이제까지!!!!!!" "니가 니 얼굴 이쁘다고 자랑하는 건 들었다." 백동영 그 새끼 목은 내 손으로 땄어야 한다는 것도 알아들었고. 나는 펴지지 않는 주먹을 무릎위로 눌러 붙이며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저 불쌍한 것을, 스무살 때부터 지금까지 갖고 노신 걸로도 모자라서 이용해먹으려고 하셨다? 그것도 위장된 내부 기밀을 팔아먹게 하는 이중 스파이로?? -너 정말 잘 죽은 거다 백동영. 혹시 먼저 죽지 않았더라면 넌 내가 죽였을 거다. 내 손에 걸렸으면 곱게 죽지 못했어 너. 사지육신 중에 어디 멀쩡한 데가 한 군데라도 있었을 것 같아? 짐승만도 못한 자식 같으니라고……… 나는 내면의 동요를 간신히 감추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뜬 진석이 화를 간신히 참으며, 내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못 알아들은 체 하지마. 형이 뭐라고 하건 이번 일은 -." "…이상한 냄새나지 않냐?" "내가 바본 줄 알아? 그딴 식으로 이야기의 맥을 끊어 놓으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니. 정말로,……뭐가 타는 냄새가 나는데." "무슨-, ………정말이군. 뭐야 이건?" 화를 발칵 내려던 진석도 내가 맡은 것과 같은 냄새를 맡았는지 눈살을 찌푸리더니 의아한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서야 이게 무슨 냄새인지를 깨달았다. 스프 타는 냄새다. 불에 올려놓고 들어와서는 잊어버린 . 이런. 나는 낮게 혀를 차고 말았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식품의 재고 검사를 한 결과 스프라고 있는 건 달랑 그거 한 봉지였다. 우유도 유통 기한 때문인지 한 통 뿐이었고. 그러니 지금 요상한 냄새를 풍기면서 눌러 붙고 있는 저 스프를 제외하면, 유동식은 있는 게 없었던 것이다. 저게 다 타면 환자한테 먹일게 없었다. "스프 다 타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바지춤에 찔러둔 숟가락을 다시 손에 드는데 진석이 화를 냈다. "지금 스프가 문제야. 이야기하던 중이잖아. -어딜 일어서?" 팔이 자유로웠다면 나를 끌어 당겨 자신의 앞에 앉혔을 모양이지만, 녀석의 두 팔은 묶여 있는 상태였다. 거기서, 안 서!!! 등의 발악을 하고 있는 녀석을 뒤로하고 나는 부엌으로 나왔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소용이 없다는 것을 녀석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녀석이 그런 지옥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를 죽이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나 혼자서 살자고 녀석의 곁을 떠난다? 하. 녀석이 부디 가능한 것을 바랬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을 판 사이에 옥수수 스프가 다 눌었다. 하는 수 없이 밥을 끓여서 흰죽을 만들었다. 깨조차도 없어서 소금간만 간신히 한 것이지만 꽤 배가 고팠던지 진석은 한 그릇을 다 비워냈다. 내가 흰죽을 끓이는 내내 발악하며 소리를 질렀던 녀석은, 얼마 없던 체력까지 모두 바닥이 난 모양이었는지 축 늘어져 있다가 죽을 갖다 주니까 군소리 없이 잘 먹었던 것이다. 방금전까지 '음식 따위가 필요하다고 누가 그래! 이거나 풀어 이 새끼야!!' 따위를 지껄이시던 바로 그 입으로 말이다. 시건이가 방음장치는 해놨는지 모르겠다. 나는 새삼스레 그것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소란을 떨어 댔으니 외국 같았으면 당장에 경찰을 불렀을 일인 것이다. 다행히도 이 빌라의 이웃들은 성격들이 꽤 좋은 모양이었다. 신고는 둘째치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조차 없었으니까. 위와 같은 잡생각에 빠져 있긴 했어도 정신을 아예 빼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녀석이 숟가락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는 말없이 빨래 줄을 다시 집어들었다. 내가 줄을 들고 다가가자, 포만감에 잠시잠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던 진석이 의아하게 눈썹을 휘며 질문을 던졌다. "왜 이래?" "다시 묶어야지."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진석은 내 대답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턱을 치켜들며 시건방지게 대꾸를 했다. "안 묶어도 돼. 도망 안가." "이제 네 말은 안 믿어." "썅 -. 오지랖 넓게도 부득불 끼어 들어주시는 형님께 너무 감사해서 절대로 도망 안 간다니까! 큰 코 다치는 꼴을 꼭 한번 봐야겠다고. 그래서 안 가. 됐어?" 녀석이 독기 어린 눈망울을 빛내면서 중얼거렸다. 그 눈에서 줄기줄기 뻗는 한망(閑忙)만으로도 녀석의 기력이 제법 회복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아 없애고 있는 진석을 향해 한숨을 쉬어 보였다. 배에 먹을 거 들어갔다고 금새 생생해지는 구나 연진석. 헌데 미안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 딴에는 제 생각을 해서 기껏 죽까지 쑤어다 바쳤더니, 기력을 회복해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형님을 물어뜯는 것이냔 말이지. 나 참. 빈말로도 기특하다고는 못하겠다. "안 됐어. 그냥 형 말 듣고 얌전히 묶여. 그럼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해." "정신 나갔냐? 내가 편하긴 뭐가 편 해? 이거 놔. 싫다 잖아!" "세상은 네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대체 언제쯤에나 배울 거냐?" 나는 빈정거리듯이 되물었다. 몸을 빼려는 녀석에게 재빨리 달려들어, 녀석이 온 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는 것을 힘으로 눌러 버렸다.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의기야 좋았다만 단순한 의기만으로 일이 해결된다면 우리나라는 36년 동안이나 일제치하를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발이 묶여 있는 터라 운신도 불편하다. 게다가 힘도 제대로 낼 수가 없을 터다. 반항하겠다는 옹골찬 의지와는 다르게 녀석은 제 기운조차도 다 쓰지도 못하고 내 손아귀에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녀석의 의지에 반해 놈을 억누르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해사해 보여도 일단은 사내새끼라서 여자들처럼 한 손아귀에 두 손목이 들어오지 않는 터라 두 손을 모두 사용해야만 했다. 게다가 사지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도 녀석에겐 아직 몸통이 남아 있었다. 어떤 방향으로든 튀어 달아나겠다는 의지로 몸부림치는 놈의 몸통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흉기가 되었다. 나는 녀석의 두 손목을 잡고 그대로 침대 기둥으로 질질 끌고 갔다. 녀석은 감자 푸대처럼 질질 끌려오면서 거친 패악을 부렸다. 나는 거의 온 몸으로 녀석의 내리누르면서 힘겹게 빨랫줄을 찾았다. 한동안 소리 없는 욕설, 노골적인 악의, 힘 겨루기, 서로의 얼굴을 할퀴려 들기 등등의 온갖 방법을 동원한 처절하기 그지없는 사투가 벌어졌다. 진석이 놈은 더럽게도 끈질겼다. 아마도 다시 손이 묶이느니 탈진해서 죽어버리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나는 녀석의 몸과 어느 한 부분도 떨어져 있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밀착한 채 녀석을 프레스기처럼 눌러대기 시작했다. 상처가 짓눌려 고통스러울 텐데도 녀석은 반항을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 절박하게 반항하는 상대를 어떻게 눌렀을까. 나는 새삼스레 진석을 강간한 놈들에 대해서 의문을 느끼게 되었다. 분명히 한 놈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또한 그러한 까닭이었다. 제 정신인 이 놈에게 강제로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것은 고양이를 목욕시킬 때와 다름이 없는 난투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도 자그마한 고양이가 아니라 신체 건장한 사내를 상대로. 솔직히 말하자면 인간이 할 짓이 못 되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게 정신 없는 와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물론 처음엔 무시할 생각이었다. 바빠 죽겠는데 기계 따위에 일일이 반응할 정신이 어디 있겠냔 말이다. 하지만 몇 번의 전화벨이 울린 후 자동으로 돌아가는 앤설링 머신에 담기는 사람의 목소리가 다른 행동들을 멈추게 했다. 미친 듯이 반항을 해대던 진석도 덩달아 움직임을 멈추었다. 녀석도 또한 전화기에서 들리고 있는 목소리를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고성과 욕설로 범벅이 되어 있던 방안이 일순 고요해졌다. /전화 받으라니까. 시간 없어./ 낮은 목소리였지만 초조한 듯한 기색이 어린 그 목소리는 시건이의 것이었다. 나는 진석을 내려다보았다. 진석은 미간을 험상궂게 찌푸리면서 나에게 짜증을 냈다. "뭐 하는 거야. 어서 전화 줘." 전화를 달라고 하는 걸 보니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끝내고 싶은 모양이다. 흥. 안될 말이지. 나는 (마지못해) 진석을 풀어주고, 앤드 테이블에 놓여진 전화기를 끌어 당겨 스피커 오픈을 시켰다. 진석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두 손으로 침대 기둥을 잡고 스스로의 몸을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다리가 묶였으니,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수화기 줘." "스피커 오픈 시켰어." 진석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은 나를 향해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시건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오자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지리도 자기 말을 안들어주는 내게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 더 급한 용건이 있다는 것을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거기 누구 없어? 진석아? 우제열?! 왜 대답이 없어? 젠장. 이 바보가 아직 집 못 찾고 있는 거 아니야? 연락할 도리가 없으니 알 수가 있나. 놈이 집을 못 찾았으면 진석인 지금 혼자 있을텐데…/ "어이, 다 들었어." 나는 나를 감히 천하의 천치 취급한 녀석에게 냉담하게 대꾸했다. 침대 보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진석이 한숨을 쉬며 그 뒤를 이었다. "전화 받았어요 형." /뭐 하느라고 이렇게 늦게 받어. 시간 없는데./ 시건이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녀석의 어투에 울컥하고, 이제껏 속으로 담아두려고만 했던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뭘 잘했다고 제 주제에 신경질을 다 낸단 말인가. 나한테 진 빚만 다 갚으려고 해도 평생이 걸릴 녀석이 감히 우리들에게 신경질을 내다니. 뻔뻔하기도 하다. "시간 없으면 용건만 말하고 끝내." "형은 가만히 있어 좀. 이야기는 내가 할 테니까." /둘 다 시끄러워! 이야기는 내가 할 테니까 니들은 그냥 들어. 짐작은 했겠지만 여기는 지금 밖이야. 이것도 추적될 거 같으니까 길게는 못한다. 잘 들어. -회담은 실패로 끝났어. 백승언은 장부만 받고 일을 끝내는 걸 원하지 않아. 기어이 너를 잡고 싶은 모양이다. 그까짓 장부 따윈 상관없다고 이야기하더군. 이번 일에 타협은 없다고. 자기는 원하는 건 꼭 이루고 마는 성격이라고 말이야./ 나는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진석을 돌아보았다. 진석은 묵묵한 얼굴을 한 채로 말 없이 시건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큰 폭력조직의 회장이 비밀 장부까지 포기하고 자신을 잡아죽이려고 든다는 이야기에도 별로 놀라지도 않는 듯한 기색이라니. 나는 그 얼굴을 보고서 녀석이 백승언의 선택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백동영이나 백승언이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오십보 백보의 인간들이었다. 그런 종자가 이런 중요한 일이 끝난 후 살인멸구를 생각하지 않는 데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만큼 확실한 입막음이 달리 없다는 사실을 모를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보다 수월하게 녀석들에게서 빠져 나온 것은 아마도 그래서겠지. 움직이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궤적은 쉽게 드러날 테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는 니들한테는 못 가. 나는 나대로 어떻게 다시 협상을 이어 볼 테니까, 답답하겠지만 너는 거기에 계속 있어 줘. 함부로 밖에 나가지도 말고. 내가 어떻게 수습을 해볼 때까지 만이라도 시간을 좀 벌어 줬으면 해. 여기서 니가 잡히면 사태를 회복시킬 기회도 없이 다 끝나버리고 말아. 염치없지만 부탁한다./ "그 남자 말은 믿지 말아요. 어떤 일이 있어도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남자니까. 장부 따위야 대수롭지 않은 척 굴었겠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형도 알 거예요. 조심해요. 이번에 잡히면 형은 정말로 죽어요. 내 옆에 있든 없든, 그런 건 상관없어요." /알아. -그리고 미안하다. 이제와 이런 이야기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진짜로 제열이까지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어. 최후의 최후가 아닌 이상에는 그렇게 하기 싫었다./ 어이. 이시건. 내가 여기 없는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하지 말아주겠어? 나 다 듣고 있어. 아까 상황을 듣고도 모르냐. 이거 스피커 오픈이라구?? 나는 시건이 진지하게 진석과 - 정확히 말하면 진석이 하고만 - 통화를 하는 것을 들으며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진석은 내 이름이 나오자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확실한 표정 변화를 보였다. 처음 내가 여기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화를 냈을 때처럼 번뜩이는 듯한 눈이 되어 전화기가 시건이라도 되는 양 뚫어지게 노려보았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살벌한 표정이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다음에 하기로 하죠. 따로 해야 할 이야기 같으니까요." /…알았다. 그럼 이만 끊을게. 이제 이쪽으론 전화 안 할거다. 이후로는 전화가 와도 가능하면 받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후의 연락은 다른 방법으로 하마. 너도 아는 '그' 방법으로./ "알았어요." /조심해라./ 마지막으로 당부가 끝나고 전화가 끊겼다. 진석은 골치가 아픈 듯, 내가 풀어준 두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눌렀다. 나는 끝내 내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끝나버린 전화기를 노려보면서 중얼거렸다. "망할 놈. 저 자식은 좋은 소식을 들고 나타난 적이 없어."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던 비밀 장부에 대한 협상. 설마 시건이 자신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시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무효로 돌아가자 씁쓸한 기분만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 남자가 기어코 진석을 잡아죽이고야 말겠다고 공언한 것을 들어버린 터라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나의 중얼거림을 들은 듯 자기의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던 진석이 눈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까만 눈동자 가득히 비웃음을 드러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왜? 좋은 소식 하나 있었잖아. 형도 들었지? 나는 정말로 여기에서 못 나가게 됐어. 완벽하게 갇혔지. 이제 내가 형을 따돌리고 도망갈 거라는 망상 따윈 집어치우고 빨래 줄이나 풀어 주는 게 어때? 발가락에 감각이 없어." 구구절절 옳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녀석의 어투가 워낙에 얄밉기 때문이리라. 나는 한숨을 쉬고, 녀석의 다리를 묶은 빨래줄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묶인 채로 발버둥을 쳐서 그런지 내가 묶었던 때보다 더 단단하게 살을 파고든 듯한 빨래줄이 녀석의 다리에 감겨 있었다. 그나마 중간에 수건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피까지 비쳤으리라. 내가 해놓고도 녀석이 그런 흉을 입은 게 안타까워졌다. 그러나 혀를 차고 있는 나는 안 중에도 없는지 녀석은 횡하니 몸을 돌려 침대에 눕더니 자겠다는 시위를 한다. 그래. 자라. 저녁나절부터 시작해서 장장 여섯 시간 동안이나 자놓고도 또 잘 수 있다면. 나는 방을 물러가며 조용히 불을 꺼주었다. 그리고 나도 방문 앞으로 소파를 끌고 와서 방문을 완전히 막아 버리고는, 그 위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의심 많은 인간이라고 그래도 상관이 없었다. 사전에 신경을 써두는 편이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백배는 나은 일이니까 말이다. ********* 제열이.......어째 점점 스토커화 되고 있는 듯?;; 좀 점잖고 조용하고 생활능력 있고 착실한 공을 쓰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취향과 쓸 수 있는 것의 차이는 틀린가 봅니다. 저는 수수하고 얌전한 성격을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늘 그런 성격의 주인공을 써보고 싶어하구요.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라니까요;;; 가장 완벽한 아침 15 머리가 지끈 지끈하게 아파 왔다. 언제부터인가 이놈의 편두통은 내 몸에 붙은 고질병이 되었다.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아서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마르고 갈라터진 입술에 닿는 차가운 필터가 씁쓸하기만 하다. 걸을 때마다 하반신을 직격 하는 통증이 낯설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까지 당해본 것도 오랜만의 일이다. 처음. 백동영의 손아귀에 들어간 삼 개월 동안 소위 '길들인다'라는 명목으로 성폭행을 감당해야 했던 이후로 근 십 년만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길'이 든 이후로 이제껏 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섹스를 해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교미라고 해야 할 그 어떤 것을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최소한의 신체 부위만을 간신히 붙인 채 하반신으로 남자를 받아들이는 일만 반복했다. 그나마 그것도 몇 달에 한번 꼴일 뿐인 일이었다. 내 몸에 손을 대는 걸 내심 싫어하던 백동영은 페팅조차도 한 달에 할까 말까 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의무방어전이라도 치르듯 지루하고 열없는 그 얼굴이 몸 위에서 흔들리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러고 보면 그 인간도 참 지독한 인간이었다. 호모 섹슈얼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성애자 주제에 계획을 완성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자그마치 십 년이나 남자를 안아 오다니. 그 처절한 고행의 이유가 고작 망에 불과했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서글픈 일이기까지 했다. 그의 야망이 가치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의 그러한 고생은 결국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자그마치 십 년 동안이나 복수의 기회만을 노려왔는데 결국 그에게 돌아간 것은 복수의 영광이 아니라 배신의 오욕뿐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등을 찌른 칼날은 적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연마해 놓은 것이었다. 남자가 손에 든 인연만 없었던들 그의 등을 찌를 이유가 없었을 것이 틀림없는 도구. 하지만 그렇게 그를 해치웠다고 해서 도구의 운명이 편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본래 토끼를 잡으면 개는 삶아 먹히는 법이 아니었던가. 나는 내 자신이 고사 속의 개의 운명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네가 그토록 충실한 놈이라는 것을 그 남자가 몰랐던 게 유감이군.' 그러다가 문득, 그 남자와의 마지막 대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깡패두목보다는 차라리 호스트가 더 어울릴 정도로 색기 어린 눈웃음을 가졌던. 아름다운 얼굴에 어울리는 화사한 미소를 머금을 줄 알던 그 사내가 나를 그런 종류로 비유하며 즐거워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다리에 힘도 들어가지 않아 바닥에 그대로 머리를 박은 채 새빨간 융단 카펫 속으로 스며드는 내 피를 멍하니 바라봐야만 했던 나를, 남자는 온화하게 희롱을 하고는 웃었었다. 남자의 조롱은, 실제로 남자가 나를 조롱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뼈아프게 들렸었다. '한번 정한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은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미덕이지. 그 남자가 조금만 더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면 널 그 따위로 써먹진 않았을 거야. 창부라니. 돈에 따라 마음까지 파는 가련한 역할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화사하게 피어오른 꽃 같은 얼굴 속으로 송곳니를 감추고 있는 너 같은 인간에게는, 주인을 위해 적을 물어뜯는 편이 더 어울리니까 말이야. 나는 말이야, 예전부터 그런 게 갖고 싶었어. 주인말고는 다른 곳은 절대로 보지 않는 충실한 개. 내가 너라는 존재를 얼마나 힘들게 찾아냈는지, 너는 아마 모를 거야.' 젠장할. 고막이 찢어졌는데도 소리가 들리다니. 이게 어찌된 영문이지? 남자가 구애라도 하듯 다정하게 지껄이는 동안 피를 흘리며 바닥에 엎어져 있었던 나는 남자가 떠들어 대고 있는 헛소리가 그대로 들린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손가락 하나도 옴쭉달싹도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남자는 프로였다 . 그 자신이 손을 쓰는 일이 잘 없기는 하지만, 그게 남자가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니. 남자는 자신이 그 일을 너무나도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흥미를 잃은 축에 드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솜씨 자랑은 확실하게 하는 법이다. 부러진 데 하나 없이도 이토록이나 고통스러울 수 있다니.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남자가 자신의 솜씨를 내게 자랑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사지가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본래 사람은 너무 기가 막히면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그 뒤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어차피 이런 이야기에서 줄거리란 뻔한 것이 아니었던가. 결국 나란 인간은 사마귀를 노리느라 정신이 팔려서 등 뒤에 매가 있다는 것도 몰랐던 가련한 참새였던 것이다. 그 남자에게 무슨 일을 당했든 그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몸이 당한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남자가 내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시건은 모르겠지만, 그 남자가 그에게 한 말은 사실은 그에게가 아니라 내게 한 말이었다. 내가 들으라고 일부러 한 말임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이시건과 내가 연락이 닿을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남자가 어떤 방식으로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나는 그 남자가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방식에 대해서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남자가 말한 것은, 실행의지가 분명하게 따르기 때문에 협박이나 공갈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는 종류의 경고였다. '이 곳에 있으면 언젠가는 들켜.' 관자놀이를 두 손으로 문지르며 나는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마치 송곳으로 관자놀이를 후벼파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두통 때문에 생각에 집중하는 것이 무척 힘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이 조급해서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더욱 없었다. '그 남자는 나를 쫓을 거야. 아마도, 나만을 쫓겠지. 이시건은 그냥 풀어준 거야. 백승언은 단지 그 경고를 말을 내게 전하려고 그를 풀어 준 것 뿐 일 것을 테니까 말이야. 그 남자는 시건에게 그다지 흥미가 없어.' 그런 경고를 내게 전한 남자의 의도는 뻔한 것이었다. 내가 겁먹길 바라는 것이다 그 인간은. 그 남자가 날 손에 넣고 싶어하는 것은 나를 그 자신의 손으로 망가트리고 싶기 때문이었으니까. 비밀 장부도 살인멸구도 사실은 구실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남자는 다만 자신이 잃어버린 장난감을 되찾으려고 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진정으로 비루하군 너는. 그렇게 탐이 나는가? 너를 향하지도 않은 충성이?' 네 힘으로 얻어낸 게 아니야. 너를 위한 게 아니야. 내 마음은, 너를 위해서는 한 조각도 없어.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가 속으로 상해버린 성대가 거친 금속음을 낸다. 나는 그 탁하고 듣기 싫은 음성으로 남자를 조소했었던 적이 있었다. 남자에게 겁탈 당한 후, 만족해 몸을 떼는 남자를 향해 던졌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나의 조롱에 오히려 기분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그는 내 안에서 사정을 할 때보다 더욱 희열에 빛나는 눈을 하고 나를 내려다보면서, 내가 던진 비웃음에 대해 명쾌하게 대답까지 했던 것이다. '상관없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도.' 백승언의 입 꼬리가 칭찬하듯 휘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불현듯 나는 그 남자가 그런 류의 질문을 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저 남자가 그에 대한 대답을 내게 매우 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내가 예민해서인 것만은 아닌 듯 했다. 남자는 이제부터 심부름을 해야 할 아이에게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찬찬히 알려주는 어른과도 같은 상냥함으로 내게 말했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네가 마음에 들어. 아까도 말했잖아? 한번 정한 주인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종류의 개를 갖고 싶었다고. 네 주인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아? 그런데 내가 어찌 감히 너의 충성을 바라겠어? 그를 버리고 나를 선택한다면, 너는 길거리를 굴러다니는 흔한 똥개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말아. 그러면 나는 너에게 흥미를 잃고 말겠지. - 그러니 부디 품위를 잃지 말아주길 바래. 연진석.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이 가련한 나에게 불변의 마음도 있다는 사실을 부디 증명해 주라고.' 남자는 유쾌하게 웃기 시작했다. 정말로 즐거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 밝다 못해 건강하게까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서 한 점의 어둠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소름이 끼쳤다. 명료하기까지 한 맑은 정신으로 저렇게까지 미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충심으로 바라 건데, 부디 내 시험을 통과해주길 바래. 네 주인은 아주 흥미로운 인간이더군. 믿을 수 없을 만큼 진지하고 제대로 고지식했지. 그런 인간이 부서지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네 쪽이 더 흥미롭더란 말이야. 그러니 내 흥미를 잘 붙들어 매두는 것이 좋을 꺼야.' 가장 무서웠던 점은, 남자가 한 점의 거짓도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진심이었고 설사 진심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입 밖에 나온 말은 실천하고 보는 사람이 그였다. 이 일은 그 남자의 게임에 불과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더욱 자신이 정한 룰을 지킬게 틀림이 없었다. 도박만큼 남자를 진지하게 만드는 것은 달리 없을 테니까 말이다. "차라리 러시안 룰렛이 낫겠군. 그거라면 누구나 승복할 수밖에 없는 결과가 날 테니까 말이야." 모든 일을 차근히 되짚어 보던 나는 도무지 헤어날 길 없는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 내동댕이쳐진 기분을 느끼며 간신히 욕설을 삼켜야만 했다. 모든 것이 그 변덕스러운 남자의 마음에만 달려 있다는 사실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미친 사람의 이성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 그 남자에게 약속이 과연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둘 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지독한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 것은 그 빌어먹을 이시건 놈이었다. 제열이 형만큼은 이 재수 없는 판에 끌어들이지 않고 싶어서 그토록이나 용의주도하게 조심을 해왔는데, 하필이면 이럴 때에 그 남자가 형을 불러 모든 걸 다 망친 것이다. 이시건 때문에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타이밍으로 제열이 형은 자신의 곁에 있게 되고 말았다. 이건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패였다. 제열이 형에 대해서라면 분명 시건에게 경고를 해뒀던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쪽이 제대로 약속을 이행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 불성실한 거래가 아닐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자신과 연락이 닿지 않았으면 모를까, 한번 접촉을 했다가 다시 헤어지고 난다면 다음의 타겟은 분명히 제열이 형이 되고 말 것이었다. 한번 자신을 놓친 백승언이 우제열 같이 가치가 높은 인질을 놓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남자가 그 행동을 좀 더 일찍 하지 않은 것은 재미있는 일은 아껴두고 싶은 심보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형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내가 떠난 뒤라면 형도 나를 찾아 나설 것이고, 그렇게 거리를 나섰다간 아무리 날고 기어도 형은 대정에 잡히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형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형을 따라다니고 싶은 것은 사실 이 쪽이었다. 묶어두고 감시하는 것은 차라리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어쩌면 나보다도, 오히려 형이 위험할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형.' 형을 생각하니 문득 걱정이 들었다. 인스턴트가 아닌 것은 쌀 밖에 없다고 내내 불평하던 것이 뒤를 이어 떠올랐다. 맨 밤일을 하고 새벽장을 보던 사람이니, 평소같이 생각하고 장이라도 보러 나가면 큰일이다 싶어졌다. 나는 입에 물어보지도 못하고 다 타버린 담뱃재를 바닥에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큰한 통증이 꼬리뼈를 타고 올라왔지만 거기에도 신경이 쓰이지가 않는다. 머리를 찌르는 통증이 지칠 줄을 모르는 걸 느끼니 신경질이 났다. 하지만 참았다. 내 눈으로 형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그것만 확인해보는 것이 우선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방을 가로질러 안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무엇인가에 하반신이 턱하니 걸려 슬랩스틱 코미디언처럼 퍽하니 엎어지고 말았다. "억!" 몸을 지탱하기 위해 황급하게 아래를 짚었는데 뭔가 단단한 게 있었다. 앞으로 쏠리는 체중을 지탱하기 위해 힘을 실었으니 꽤 만만찮은 중량이었을 터. 가슴을 쇠망치로 맞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으로 누군가가 둔탁한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소파 등을 따라 꼬꾸라져 있다가, 누군가에게 홱 하니 팔목을 낚아 채여 소파 안 쪽으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랬다 싶었더니 어느새 족쇄처럼 강렬한 팔다리에 꽁꽁 묶이고야 말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이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 꽉 잠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제열이 형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 이 자식. 어딜 도망가려고." 어디서 가져온 걸까. 담요까지 꺼내 덮고 본격적인 잠을 청했던 듯 한 제열이 형은 어째서인지 몰라도 소파로 안방 앞으로 갖다 놓아 온통 문을 막아 놓은 상태로 자고 있었다. 이 인간……정말로 내가 여기서 도망을 갈 거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 마시러 나온 것뿐이야." 나는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생각해내) 항변을 했다. 하지만 형은 어림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흥. 누가 속을 줄 알고." 잠도 덜 깨 부운 눈을 하고서도 꽤나 당당하게 중얼 거리는게, 뭔가 보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억울했다. 형이 잘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떻게 이쪽이 탈주범 취급이 되나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잠이 와도 제대로 눈 한번 떠보지 그래? 지금 내가 이런 몰골을 하고 어딜 갈 수 있는지 그것부터 알려주면 꽤 고맙겠는데. "남이 기절한 동안 옷을 다 벗겨 놓은 누구 덕분에 런닝셔츠에 팬티 한 장 달랑 입은 게 고작이다. 이런데 이 꼴로 어딜 간다고?" 눈뜨고 한번 봐봐 형이. 이 추운 겨울에 이 꼴을 하고 형이라면 나갈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빈정거리니까 제열이 형은 겨우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잠에 겨운 눈이 지긋이 나를 응시하고 있지만 대체 뭘 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꿈뻑 꿈뻑. 겨울잠을 자다 일어난 곰처럼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제열이 형은 귀찮은 듯 눈을 다시 감더니 나를 자신의 품으로 휙 하니 끌어 당겼다. 키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고 체격의 차이도 별로 없었는데, 형의 팔 다리가 사지를 억누르니 어째 꼼짝을 못하겠다. 아마도 기술이 틀린 모양이었다. "상황 파악 끝났으면 좀 일어나게 해 주지 그래?" "됐어. 그냥 이러고 자. 팔다리가 얼음장같네. 옷 좀 입고 자지 이게 무슨 꼴이야." 그러니까 그 옷을 누가 벗겼냐구. 나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형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오랜만에 본다 이 본말 전도의 수법. 제열이 형은 옛날에 이런 느물거림으로 애꿎은 애송이들 속 무던히도 긁어냈었던 적이 있었다. 말로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게 양아치의 필수 과목 중 하나였으니, 양아치의 정도를 걸어 반건달로 들어섰던 제열이 형이 그런 쪽에 통달을 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형." "졸려 죽겠는데 시끄럽게 쨍쨍거리지 마라. 사람 간 떨어지게 하는 것도 가지가지지. 갑자기 없어져서 사람 놀래키는 것도 모자라 자는데 덮치냐. 됐어. 풀어주면 또 뭔 짓 할지 무서워서 못 놔줘. 이대로 자." 이대로 자라니. 이 사람이 지금 제 정신인가? 형 품안에서 돌덩이 같은 딴딴한 근육들을 침대 삼아서, 이 좁디좁은 소파 위에서 잠을 자라고? 그것도 180이 넘는 다 큰 남자 둘이서 껴안고 말이지? 하지만 형은 농담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아예 내 다리를 자신의 다리 사이에 끼우고 내 몸에 두 팔을 두른 채 내 어깨에 턱을 올리더니 - 다시 말하자면, 사람을 완전히 만수산 드렁칡처럼 칭칭 감아 댄 연후에야 -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던 것이다. 화가 나서 흔들어 깨우려고 했지만, 고르게 숨을 내 쉬면서 정말로 잠이 든 형의 얼굴을 들여다보자니 흔드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자기 딴에는 내가 걱정이 돼서 이러는 모양인데 굳이 패악을 부리기가 민망했던 까닭도 있었다. 겉으로는 모진 척 하면서 은근히 맘 여린 이 사람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게다가 이 며칠 간 나를 찾느라 정신 없이 돌아다니는 바람에 피곤이 쌓였을 걸 생각하니 차마 깨우기도 미안한 것이, 어째 애처로운 마음까지 드는 것이다. 이런 걸 사투리로 뭐라고 하더라. 아 그래. 짠하다-라고 했던가. '……젠장.' 나 정말 개 과(科)가 맞나보다. 어떻게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형이 정말로 잠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형을 깨울 수가 없는 자신을 깨닫고는 허허롭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래서야 백승언한테 충견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듯 했다. 이 사람을 지켜주고 싶어한 것, 이 사람만은 다치지 않게 하고 싶어했던 것은 모두 사실이지만, 그러나 사람의 단잠까지 지켜주고 싶다는 가증스럽도록 기가 막힌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내가 심히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자기가 원한대로 살 수 있게 해주고 싶다. 나는 나를 품에 안고 세상 모르게 잠이 든 남자를 올려다보면서 물끄러미 생각했다. 이 사람이 원한 것은 무엇이든 들어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럴 능력도 못되고 사실 그럴 주제도 되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만 이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가 바라는 방식대로 살 수 있는 것뿐이었다. 삶에 찌들어 항상 입술의 반쪽만으로 웃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 반 쪼가리의 웃음만이라도 보면서 살고 싶었다.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도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런 것에 불과했다. 피곤이 몸에 밴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잠깐 틈을 내 나를 향해 웃어주는 것. …이 남자가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을 만큼의 삶만이라도 보장해 주는 것. 비록 평생 동안 단 한번도 그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는 없을 테지만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런 거였다. 백승언이 충견의 애정이라고 비웃어도 상관이 없었다. 이게 내 사랑이었다. 이게 바로, 내가 그를 사랑을 하는 방법이었다. ****** 이게 누구 시점인지 모르시는 분은 없으시겠죠?;; 가장 완벽한 아침 16 무거운 눈을 간신히 뜨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깨가 불편하고 목이 결린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 밖으로 삐죽이 튀어나온 두 다리가 볼썽사납다. 옷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고 내 기분 또한 그랬다. 구깃구깃하게 뭉쳐져서 버려진 휴지 같은 느낌이 든다. 역시 소파는 침대로 삼기에 부적당한 잠자리인가 보다. 누군가에게 등을 자근자근 밟힌 듯한 느낌에 이맛살을 찌푸렸던 나는 소파를 끌어낸 자리에 오도카니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진석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머리를 털었다. 등에 벽을 기댄 진석은 리모콘을 손톱 끝으로 우울하게 눌러대고 있었다. 다행히 어제보다는 붓기가 많이 가라앉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잠에서 덜 깨서 꺼끌하게 쉬어버린 목소리로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 일어났어?" 놈은 나를 돌아보는 시늉도 안 한다. '어.'라는 짧고 시큰둥한 긍정의 말만이 들릴 뿐이다. 저게 무슨 대답인가. 잠이 덜 깬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가 않아 조금 고민을 하고 말았다. 뭔가 심오한 뜻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순간적으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상관을 하지 않는 듯한 녀석의 눈은 여전히 텔레비전에 고정이 되어 있었다. 시위라도 하는 건가? 나는 어딘지 모르게 반항적인 듯한 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의심을 품었다. 까만 런닝셔츠와 팬티바람인 녀석은 담요를 말아 몸에 두르고 있었다. 옷을 입고 싶었겠지만, 아마도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놈의 옷은 지금 세탁기 안에서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피범벅인 녀석의 옷가지를 세탁하려고 던져 넣고 물까지 넣었는데 그러고 나서 보니 세제가 없었던 것이다. "꼴이 왜 그러냐. 달리 옷 입을 거는 없냐?" "응." "그렇다고 거실에서 이러고 있냐. 노숙자처럼.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응." "…너 지금 나한테 개기냐?" "응." ……이 자식이 근데. 나는 소파에서 일어서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그래도 놈은 여전히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다. 단단히 삐졌거나 한 대 맞고 싶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여기며 녀석에게 다가갔는데, 가까이서 보니 녀석의 얼굴 표정이 내가 생각하던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녀석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색색의 색동옷을 차려입은 여자가 화면 안에서 다소곳이 절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새해에는 부디 좋은 일만 있으시길-.' 화면이 바뀐다. 마찬가지로 한복을 입은 연예인들이 떠들썩하게 윷놀이를 하고 있다. 화면이 바뀐다. 뉴스화면이다. 각 가정마다 조상의 얼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고, 오늘 오후부터는 벌써부터 귀성 인파가 걱정이 된단다. 나는 놈의 손에서 리모콘을 빼앗아 텔레비전을 껐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던 놈의 눈에서 그제야 빛이 돌아왔다. "-왜?" "재미있는 것도 안 하는 것 같은데 뭘 그렇게 열심히 틀어 제끼냐. 명절날 하는 프로그램이야 뻔하지." 입맛이 조금 썼지만, 지금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녀석만큼 기분이 복잡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진석이 놈은 내내 앙칼졌던 어제와는 달리 다소 풀이 죽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채였다. 녀석은 내가 처음에 착각했던 것과는 달리, 도사리고 앉은 것이 아니라 옹송그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 넓은 거실에서 발도 못 펴고 그러고 있는 것이 슬그머니 짜증이 나서 나는 녀석의 무릎을 발로 툭하니 건드렸다. "뭘 그러고 앉았어. 누가 널 패냐. 편하게 앉아." "팔 다리 내 놓기 싫어. 우풍 든단 말이야." 녀석이 귀찮은 듯이 대꾸했다. 빌라에, 그것도 보일러 빵빵하게 돌린 방안에서 우풍은 무슨 우풍이냐. 잠시 코웃음을 쳤다가, 혹시 오한이 드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쪼그리고 앉아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녀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코와 코가 거의 맡 닿을 것 같이 가까이 있었다. 녀석의 눈동자 안에 터진 핏줄까지 다 보였다. 녀석은 많이 지쳐보였다. "왜?" "아니. 오늘이 구정이었던가 싶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살았냐." "그랬지. 좀 정신이 없어서." 녀석이 열없이 대답했다. 나는 놈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놈이 눈에 띄게 우울해 하는 이유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한 해 쯤은 그냥 넘어가도 상관없어. 우리 어머니 살아 생전에도 끼니 제때 챙겨 드시던 분은 아니시잖아." "…그러니까 더 챙겨드려야 하는 건데." "됐다. 울 어머니가 밥 한 끼에 서운해 하실 분이냐. 네가 이런 꼴인 게 더 서운하면 서운하실 분이지, 제사밥 못 얻어먹으신 일 정도로 맘 상해하시지는 않을 거다." 녀석은 내 말을 듣지 않는 듯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긴. 녀석이 우울해하는 심정은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우리 어머니를 생각하는 감정이 제 부모를 위하는 것보다 더 깊은 놈이었다. 제 아버지 제사는 안 지내는 주제에 우리 어머니 제사엔 수진이에게 꼬박 꼬박 제수거리를 들려 보냈을 정도니까 말이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녀석이 다리를 안은 두 팔의 손목 께에 불그스레한 줄 모양이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만들어 놓고도 마음이 안쓰러웠다. "밥은 먹었냐." "……아니." "그럼 밥 먹자. 우리까지 굶을 순 없잖아. 남들은 진수성찬 쌓아놓고 먹는 날에 배까지 곯아서야 쓰겠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하룻밤 새에 냉장고 속의 사정이 달라졌을 리는 만무하다. 여전히 해동을 시켜야만 먹을 수 있을 듯한 레토르트 식품들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우울하게 간장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아침부터 냉동 스파게티나 피자를 먹을 생각이 없다. 그나마 간장하고 참기름은 있는 것 같으니 이걸로 대충 밥에 간이라도 하고 먹어야지 별 수가 없다. 어제 해 놓았던 밥에 간장과 참기름을 부어 비비면서 녀석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꺼진 텔레비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상태를 못 본 척 하며 놈에게 말을 건넸다. "마트를 좀 갔다와야겠다. 오래 숨어 있을 거면 아무래도 먹을 걸 좀 사와야 될 것 같아. 현금이라면 미리 빼온 게 좀 있으니까 당분간은 버티겠지." "설날 문 연 데가 있을까." "설마 한 군데도 없겠냐. 하다못해 편의점이라도 있겠지. 밥이나 먹어라. 찬은 하나도 없지만."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쟁반에 간장밥을 담아 내갔더니 녀석의 얼굴이 묘해진다. 찬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그런가? 녀석의 까탈스러운 반찬투정이 기억났던 나는 그런 놈을 무시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목구멍으로 넘어갈 수 있을만한 음식을 만든 것은 전적으로 내 공이었다. 녀석이 나에게 감히 불만을 토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인 것이다. 어림도 없다는 듯 나는 녀석에게 밥그릇을 강제로 안겨주었다. 안 먹으면 너 정말 혼난다.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지만 녀석은 밥그릇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 내게 대꾸가 없었다. 놈은 잠시 아무 말도 없다가, 건네주는 숟가락을 들고서야 꾸역꾸역 입에 밥을 처넣었다. 글썽하게 눈물이 번진 눈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밥 먹는 꼬라지를 보니 부아가 났다. 반찬투정은 아니다. 직감적으로 그건 느꼈지만, 녀석이 밥을 앞에 놓고 눈물바람인 것에 비위가 거슬렸던 나는 녀석에게 고함부터 지르고 보았다. 이게 밥 차려준 사람 앞에서 무슨 시위를 하는 것이냔 말이다. 내가 없었으면 아침부터 냉동 스파게티나 먹었을 녀석이 밥상머리 앞에서 무슨 버르장머리란 말인가!! 명절날 간장밥이나 먹고 있는 스스로의 처지가 불쌍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차라리 내 쪽이 더 한 게 아닌가. 명절날 아침부터 눈물바람인 놈을 처다 보고 있어야 하는 내 심정이 더 비참할 거라는 생각은 하나도 안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 녀석은. "아, 왜 울고 지랄이야 이 자식이. 기껏 밥 차려줬더니 반찬투정이나 하고!!" 녀석이 눈물을 닦다 말고 기가 막힌 듯 나를 노려보았다. 놈의 검은 눈이 흘러내린 눈물 때문에 더 깊게 보였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는 심정이 절절히 배인 목소리로, 녀석이 말했다. "누가 반찬투정을 했다는 거야." 녀석은 강하게 항변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항의를 들어줄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왜 우냐고 달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거지를 썼다. "반찬투정이 아니면, 왜 밥 그릇 앞에 놓고 눈물바람이야? 응??" "어머니 생각나서 그랬어!! 반찬투정 같은 거 아니란 말이야." "어머니 생각나면 쌀 한 톨이라도 꼭 꼭 씹어먹으면서 절대로 몸 안 축내겠다고 다짐을 해야지 뭐가 그리 서럽다고 울고 자빠져? 니 놈이 잘한 게 뭐 한 가지라도 있다고." 나는 녀석에게 냉담하게 말했다. 지가 정말로 울 어머니 그렇게 생각했으면 내 가슴에 이렇게 대못 박는 짓은 못 했을 것이다. 나도 잘한 건 없지만, 이 자식도 잘한 거 없기는 매한가지가 아닌가. 놈은 "어머니 굶고 계신데 혼자 밥 처먹기 민망해서 그런다!!" "씨팔. 죽은 엄마가 뭘 안다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무심코 꺼내놓은 말에 녀석이 도끼눈을 했다. 나는 새삼스레 혼자서 천하의 효자인 척을 하고 있는 놈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고 말았다. 정말로 화가 난 듯 눈물이 그렁하게 담겨 있던 눈이 매섭고 표독스럽게 변했다. 한판 붙기라도 할 양으로 나를 이렇게 노려보는데,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독살스러워서 간담이 다 서늘할 지경이었다. 이 놈은 고집이 세다. 지난 십 년 동안 그리 버틴걸 보면 독하기도 하고. 이러다가는 진짜 싸움 난다. "아씨. 알았다. 누가 들으면 지네 어머닌 줄 알겠네 진짜. 됐지? 어머니가 아들 있는 데를 잘 찾아오셨으면 이거라도 자시고 가시겠지." 나는 내가 먹으려고 했던 밥에다가 숟가락을 꽂으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밥그릇을 배란다 께에 내 놓고 돌아왔다. 밥이야 다시 비비면 되는 거고, 꾸역꾸역 울면서 처먹는 꼴을 보는 것도 볼썽사나우니까. 진석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이래도 안 처먹을래?!'라고 말하고 나서야 숟가락을 다시 입에 물었다. 눈물이 흐른 흔적이 여실한 부운 얼굴로 담요 하나 두르고 간장밥을 처먹는 그 모습은 무척이나 낯이 익은 것이었다. 하고 있는 꼴이며 모양새가 꼭 녀석을 처음 봤을 무렵처럼 보였던 것이다. 열 살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으니 이걸 누가 다 큰 사내라고 할 것인가. 이런 애새끼를 데리고 십 년 동안 살붙이고 살았다는 백동영 그 새끼를 생각하면 진짜 꼭지가 돌아서-. '아. ………씨팔.'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아차하며 혀를 차고 말았다. 저 녀석이 왜 새삼스럽게 눈물 바람인가를 몰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간장밥 때문인 모양인 것이다. 울 엄마가 밥 제대로 먹기 싫어하는 열 살짜리 녀석에게 떠 먹여 주곤 하던 그것. 녀석이 지 아버지가 술 처먹고 부리는 행패에 놀라서 오줌을 지렸다가, 아랫도리 다 벗겨진 채로 쫓겨 나와 우리 집으로 도망쳐오면 엄마는 늘 녀석을 담요로 돌돌 싸서 무릎 위에 앉히고 간장밥을 해 줬었다. 김치 하나를 찢어 입에 넣어주고, 밥 한 숟갈씩 떠먹이고. 열 살짜리 애가 아니라 한 살짜리 아기한테 하듯이 이뻐하고 귀여워 해주면서, 놀란 녀석에게 밥을 먹이고는 녀석이 제대로 잠이 들 때까지 곁에서 녀석의 등을 다독다독 토닥여 주곤 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어머니 생각나서 서글픈 애한테 하필이면 간장밥을 내놨으니 녀석이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가 있었다. 생각하지 말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녀석의 울적한 심사를 부추긴 거나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왜 이러냐 정말. 나는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모처럼 맞는 명절이고 새해인데, 찬 하나도 없이 간장에 비빈 밥을 꾸역꾸역 먹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눈물까지 나다니. 안 그래도 우리 어머니한테 약하던 진석이 놈이 저렇게 죽상을 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영 씁쓸하기만 했다. '…저 새끼 좀 잘 봐줘요 어머니. 지 부모보다 어머니를 더 끔찍하게 여기는 녀석이잖아요. 나는 혼자서도 잘 살 테니까, 어머니는 쟤만 좀 봐줘요. 쟤 네 부모는 쟤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거 아니우.' 마음이 언짢아서, 어머니에게까지 되지도 않는 투정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말에 진심이 섞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가족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유일한 녀석과 같이 있으면서도 쓸쓸하기만 했다. 남들이 행복하고 즐거운 날 이라서 일까. '남들만큼'이라는 욕심 이제는 내지 말자고 생각을 했으면서도, 막상 이렇게 우울한 상황에서 새해를 맞고 있자니 기분이 착잡하게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즐겁고,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한 이 날에, 고작 간장밥 정도에 눈물 바람이 되는 불쌍한 인생과 같이 있어서 그런 모양인지. 아니면 그런 녀석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 할 주변머리도 없는 스스로가 안타까워서인지. 서럽고 우울한 명절이었다. 녀석과 마찬가지로 꾸역꾸역 밥숟가락을 들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 원래는 어제 올리려고 한 것인데요 못 올린 이유는.... 외가댁으로 잡혀;;가서죠;; 이제 집에 돌아왔습니다. 외가댁에서 외삼촌이 자랑하시는 비장의 헤네시랑 레미 마틴을 축내고 왔습니다. 헤네시가 더 좋더라구요 저는. 향도 더 깊고, 달고... 흐흐흐.